올해 2월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이 노동당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가두시위를 하는 모습. 1998년 황해제철소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탱크에 깔려죽었다는 이야기는 창작된 허구였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주성하 기자
2001년 모 월간지에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 사건’이라는 탈북민의 기고가 실렸다. 황해북도 송림시에 있는 황해제철소에서 간부들이 압연 철판을 중국에 팔아 옥수수로 바꿔 노동자에게 배급을 줬는데 보위사령부가 탱크를 몰고 몰려와 간부들을 무리로 처형했다고 썼다. 다음 날 노동자 수천 명이 제철소 정문 앞에 모여 이에 항의하자 수십 명을 탱크로 깔아 죽였다고 주장했다.
처형장에서 김일성의 간호사를 하던 여성이 마이크를 뺏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반발하자 그를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는 묘사까지 자세하게 보탰다. 처형된 사람들을 평토장했는데 밤에 사람들이 몰려와 봉분을 만들고 수백 개의 헌화를 하고 갔다는 등 이후 다른 탈북민의 그럴듯한 설명들까지 보태졌다.
이런 말들을 토대로 황해제철소 폭동이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건과 유사한 북한의 대표적 인민 항쟁이라고 추앙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고, 인터넷에도 그런 글들이 적지 않다.
취재를 통해 파악한 황해제철소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이 3년째 이어지던 1998년이 되니 북한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공장 자재를 훔쳐 팔고, 전선줄을 잘라 팔고, 심지어 철도 레일까지 뽑아 고철로 팔았다. 사회가 수습 불가 상황으로 치닫자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울려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보위사령부는 신의주와 혜산 등 중국과의 주요 밀무역 통로를 집중 조사했다. 신의주에서 이들은 철강재가 고철로 팔리는 것을 파악하고 추적에 들어갔는데 북한의 양대 제철소로 꼽히는 황해제철소가 연루된 것이다.
당시 인구 13만 명의 송림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오직 제철소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업도시라 아사자가 전국 평균 이상으로 나왔다. 제철소 당위원회에선 직장 스스로 먹고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철제일용직장 같은 부서에서는 석유곤로나 불고기판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제철소 핵심인 강철직장은 팔 것이 없었다. 전기가 없어 철도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제철로 바닥에 깔린 철로 만든 타일인 ‘깔판’을 뽑아 팔았다.
신의주에서 보위사령부 중좌 한 명이 송림에 잠입해 깔판을 사갈 거간꾼으로 위장해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은 성길이라는 이름의 제철소 선전대 대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 도청기를 설치해 연관자들도 색출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1998년 8월 초 오전 3시경 보위사령부는 공포감을 주기 위해 인근 탱크부대의 전차들을 동원해 송림에 진입했다. 주로 장갑차들이었고, 탱크는 몇 대뿐이었다.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뒤에서 불만은 토로했지만 사형장에서 반발한 사람도, 다음 날 제철소 정문에 모여 시위한 사람도 없었다. 북한에서 정부에 반항하거나 처형된 사람의 무덤에 헌화를 하는 행위는 일가족까지 연루돼 처벌되는 정치적 범죄이다. 더구나 탱크까지 몰려온 와중에 감히 당국에 반발할 수 없었다.
송림에 왔던 전차부대는 10여 일 더 머물다가 철수했다. 사회를 정화시킨다며 송림에 전차부대를 진입시켜 11명을 처형한 것이 황해제철소 사건의 진실이다.
송림에 탱크부대까지 진입해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는 소문은 북한에 빠르게 퍼졌다. 여론이 나빠지자 김정일은 “총성이 너무 큽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후 송림에선 “사형수 한 명이 눈치를 채고 도망갔다가 나중에 잡혔는데 김정일이 총소리 그만 내라고 하는 바람에 살았다. 결국 먼저 도망치고 볼 일이다”는 말도 퍼졌다고 한다.
‘황해제철소 폭동 사건’처럼 몇몇 탈북민이 지어낸 거짓말이 한국 사회에 혼란을 빚어낸 사례는 여러 건이 있다. 탈북민의 말을 무작정 받아쓰다간 언젠가는 곤경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