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승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향해 “약 80세 정도가 그런 (적정한 수명)한도선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발언한 정철승 변호사와 그의 SNS. 정 변호사는 현재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 측 법률대리인을 맡고 있다. 정철승 페이스북 캡처
이것도 대물림인가 싶다. 사회의 어른을 공격하는 그들의 태도 말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유족 측 변호인 정철승은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대해 “100세를 넘긴 근래부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작심하고 하고 있다고 한다”며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겨난 것일 게다”라고 1일 페이스북에 썼다.
‘뉴스공장’의 김어준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본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101세가 된 우리나라 명예교수가 ‘일본과 아시아의 향후 50년은 일본의 선택에 따라 향방이 달라질 것이고, 한국은 자유가 없어져 북한이나 중국처럼 되면 인간애도 파괴될 것이기에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했다”고 같은 날 첫 방송 멘트를 날렸다.
‘그 분의 사견은 존중’한다는 ‘김어준의 생각’도 존중한다. 그는 한국의 위상이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고 한참 주장하고는 이런 상황임에도 “일본 극우매체의 ‘턱도 없는 기사’를 우리가 포털을 통해 읽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일본과 산케이는 물론이고 (친일적 냄새가 나는) 101세의 철학자, 심지어 (언론개혁을 당해 마땅한) 포털까지 싸잡아 비난한 김어준의 화법엔 존경을 금할 수 없다.
● 사회적 어른에게 하는 말 “별 꼴 다 본다”
그러나 어디서 분명 본 듯한 느낌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바로 문 정권이 전범(典範)처럼 떠받드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미 해봤던 경험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참 별 꼴 다 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2005년 10월 국무총리 이해찬이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노기(怒氣)를 띠며 터뜨린 발언이다. 그것도 ‘우리사회의 어른’ 김수환 가톨릭 추기경을 겨냥해.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 1,3면
국회 본회의가 열리기 사흘 전인 10월 21일 동아일보는 김수환 추기경과의 특별회견을 실었다. 83세의 고령이었던 추기경은 “요즘 나라가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으로 갈라져 있어 너무 걱정스럽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친북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노무현 정부가 싸고도는 데 대해 “우리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했다.
● ‘우리 위의 어른은 없다’는 그들의 태도
그 무렵 나라는 친북 교수가 촉발시킨 국가 정체성 논란으로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 추기경이 걱정한 것도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바로 그 문제였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유신체제 내내 수배, 감옥생활을 했지만 당시 (우리를) 빨갱이로 몰던 사람들이 요즘 와서 이념,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살면서 참 별꼴 다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 ‘싸가지 없음’을 능가하는 그들의 행태
과거 이해찬이 김 추기경의 우려를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으로 격하한 것은 최근 정철승, 김어준이 김 명예교수의 우려를 시대착오적 발언으로, 심지어 나이 탓으로 돌린 것과 다르지 않다. 노무현 시절에도 집권세력은 민주화가 다수 국민이 이뤄낸 성과물인데도 자신들만의 업적으로 독점했다. 정부를 비판만 하면 수구보수로 몰았다. 이해찬의 안하무인(眼下無人), 유시민(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싸가지 없음’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막말’과 함께 당시 집권세력의 상징이었다. 노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그랬듯,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듯한)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가 유독 눈길을 끈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다.
● 결국 태도 때문에 망할 수 있다
“어째서 지난 100년 동안 멀쩡한 정신으로 안하던 짓을 탁해진 후에 시작하는 것인지, 노화현상이라면 딱한 일”이라는 소리를 어떻게 ‘100세 철학자’에게 할 수 있는지 보통 국민은 이해하기 어렵다. 김 명예교수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범 집권세력이 보여주는 그 형언할 수 없는 태도는 노무현 시절을 가볍게 능가한다. 뒤늦게 사과하긴 했지만 더불어민주당 김승원 의원은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가 무산되자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날리는 ‘GSGG’라는 욕설을 페이스북에 쓰기도 했다. 패륜(悖倫). 인간으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그런 현상. 국어사전은 패륜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해선 안 될 일 같지만 멀쩡한 사람들, 그것도 집권세력에 가까운 이들이 자행하면 사회적 전범이 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2013년 대선(패배) 회고록에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적었다.
내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다면 여당 대선후보는 필시 “우리가 180석을 쟁취했다는 자부심으로…패륜적 진보를 자초한 것은 아닌지”라며 처절한 회고록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