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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뒷날개]페미니즘 논의, 일단 대화부터

입력 | 2021-09-04 03:00:00

◇여성 없는 민주주의/마에다 겐타로 지음·송태욱 옮김/264쪽·1만6000원·한뼘책방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면서 술도 참 많이 마셨다. 과거엔 편집자가 술자리에서 저자와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분위기를 돋우는 적절한 음료와 함께 자유롭게 나누는 대화는 인문학의 꽃이라는 지론을 내세우면서 과음이나 폭음도 합리화한 지난 세월이었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 중인 지금은 예외지만.

다른 출판인들과 술을 마시면서 언쟁도 참 많이 했다. 언쟁은 여자는 잘 모른다는 걸 전제로 남자가 과하게 설명하는 맨스플레인(man+explain)을 지적한 인문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의 제목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길어질 때 반발하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곤 했다. 책의 저자나 선배 편집자에게 배워야 할 점이라면 그때도 많고 지금도 많다. 문제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내 얘기는 듣지 않고 독백만을 이어가는 일방적인 태도다.

이 책은 남성 독백이 남성 지배의 토대라고 지적한다. 일본은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고, 토론하고, 상대방을 추궁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남자다. 통계에 따르면 1946∼2017년 전후 일본의 총선거 당선인에서 여성 비율은 대부분 10% 미만이다. 일본은 ‘남성 지배’가 채택되어 온 국가인 것이다.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 교수이자 정치학 개론 강의를 맡았던 저자는 남녀 불평등 문제에 전체 28회의 수업 중 1회를 할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업 준비로 여러 자료를 읽는 동안 ‘나머지 스물일곱 번은 젠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치학을 젠더 관점에서 보면 부록 하나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 전체를 새로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은 민주주의의 원조이고 독일은 권위주의 체제라는 시선은 당시 참정권이 없었던 미국 여성의 관점에서 틀렸다. 의회에서 여성 할당제를 실시하면 능력 없는 여성도 뽑히게 될까. 이런 물음은 세습 의원이나 관료 출신 의원에게는 제기되지 않으므로 틀렸다는 것이다.

한국 독자가 ‘일본 남성’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뭘까. 저자는 젠더 갈등이 격화 중인 한국에서 역동성을 발견한다. 세습 남성 정치가에 의한 지배가 지속되고 있는 일본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실마리를 얻은 것. 거꾸로 페미니즘을 둘러싼 싸움 속에서 정신이 없는 한국 편집자 입장에서는 갈등 앞에 누구보다 차분한 정치학자 특유의 자세에 끌린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의 쟁점은 의논이 결렬되었을 때 생겨난다. 의논의 결렬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비로소 드러난 쟁점에 관해 자원을 투입하고 경쟁하고 협상하는 정치의 출발선인 것이다. 훗날 술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맨스플레인에 맞선다고 나도 일장 연설을 할 게 아니라 대화를 이어가는 일에 힘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논픽션팀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