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천만 개의 도시’ 박해성 연출가 1년간 시민 20여명 인터뷰 일상 재조립 주인공-서사 없이 각자의 순간 보여줘 “서울의 모습,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민”
박해성 연출가는 “연극의 미덕은 허무함이다. 매번 새롭게 시작해 끝나면 소멸하는 허무한 작업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연출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이 직접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라고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서울이란 도시는 어떤 질감, 빛깔, 냄새를 갖고 있을까. 대체로 비슷한 이미지를 그릴지 모르지만, 깊게 파고들면 각 장면은 조금씩 다를 가능성이 크다. 같은 공간에도 각자의 인생, 경험, 시선이 다르게 녹아 있기 때문.
모두의 삶 속에 녹아든 서울의 모습을 다양하고 구체적 모습으로 시각화한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천만 개의 도시’가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객과 만난다. 심오하면서도 거대한 이 작업을 맡은 건 박해성 연출가(45).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형식, 접근 방법이 어떻든 자유도가 큰 작품이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건을 다루거나 도시를 상징화한 작품은 그간 많았다. 대신 완전히 반대로 접근하기로 했다”며 기획 취지를 설명했다.
연극 ‘천만 개의 도시’는 벤치에 앉은 두 배우가 대화하는 모습이 무대 중앙에서 비춰지는 동시에 여러 인물, 상황이 무대 곳곳에서 재현된다. 서울시극단 제공
작업 방식도 독특했다. 1년에 걸친 사전 준비작업 중 박 연출가는 전성현 작가와 함께 시민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는 “시민들의 인생 이야기보다는 사소한 일상, 순간들에 대해 얘기했다. 인터뷰에 등장한 공간, 인물, 사연을 분할하고 해체한 뒤 재조립해 새로운 장면과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또 “47개의 장면을 한 작품에 담는 게 큰 도전이었다. 이런 형식이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에게도 연기는 큰 숙제였을 것”이라며 웃었다. 관객들에게도 작품은 도전해 볼 만한 숙제다. 3일 공연을 본 한 관객은 “서사가 없어 당황했지만 마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사람 구경하며 멍 때리는 것 같은 색다른 체험”이라고 털어놨다. 박 연출가는 “작품을 연출하면서 추출해낸 키워드 중에도 일상과 다른 순간으로 ‘몰입’ ‘멍 때림’ 등이 있었다”고 했다.
연극적 근본주의를 견지한다는 평가를 받는 박 연출가는 지난해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했다. 앞서 ‘스푸트니크’ ‘믿음의 기원2: 후쿠시마의 바람’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코리올라너스’ 등을 선보였다. 공대생이었던 그는 우연히 학내 극회에 발을 들였다 연극에 빠졌다. “창작자가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지만 “거대한 사상과 이론도 가장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풀어내는 연극에 끌렸다”고 털어놨다. 이번 작품에서도 박 연출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울’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뇌했단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민해 보려 합니다.” 2만5000∼5만5000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