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감염병병원 건립 지지부진
2026년 중앙감염병병원이 들어설 서울 중구 방산동 옛 미군 공병단 터.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은 올 4월 ‘세계 최고 수준의 감염병병원을 지어 달라’며 병원 건립에 5000억 원을 기부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2014년 12월 ‘치명률 90%’의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한국 정부가 의료진을 파견했다. 목숨을 건 임무였지만 10명 모집에 145명이 모일 정도로 자원자가 많았다. 그런데 파견 한 달도 안 돼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국 의료진 1명이 환자 채혈 중 주삿바늘에 찔린 것. 감염이 우려됐지만 한국으로 데려오지 않고 독일 병원으로 보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단 하나, 한국에는 에볼라를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다. 그때 시에라리온에 갔던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생명이 위험해져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팠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에볼라는 국내에서 퍼지지 않았고, 독일로 이송된 의료진은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감염병에 걸린 국민을 책임질 감염병 전문 의료기관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에볼라 종식과 함께 잊혀지는 듯했다.》
○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부로 새 국면
감염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국립병원 설립 논의는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뒤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 정부는 같은 해 9월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방침을 발표했다. 국회의 예산 삭감과 건립 예정지 주민의 반대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18년 12월 마침내 계획이 확정됐다. ‘1294억 원을 들여 100병상 규모의 중앙감염병병원을 2026년 준공하겠다’는 계획이다.
당시로서는 100병상 규모가 중앙감염병병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국내 메르스 확진자가 2018년 해외에서 유입된 1명을 제외하고 총 186명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우리에게 필요한 감염병 대응 역량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6일 0시 현재 격리 중인 국내 코로나19 확진자는 2만5756명이다. 4차 유행이 이어지며 확진자가 빈 병상을 찾지 못해 숨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올 4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이 “감염병 위기 대응에 써달라”며 정부에 7000억 원을 기부했다. 정부는 이 중 5000억 원을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2000억 원은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 감염병 연구에 쓰기로 했다. 중앙감염병병원에 쓸 수 있는 돈이 기존의 4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 ‘기존 예산’ 놓고 5개월째 씨름
기부금이 들어왔으니 병원 건립에 속도가 붙어야 마땅했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가 “거액의 기부금이 새로 들어왔으니 기존 사업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집 앞에 샛길을 내려고 했는데 그 옆에 4차로가 뚫렸다면 원래 있던 ‘샛길 예산’을 어찌 할지 다시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사업 계획을 재검토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다.
정부 예산을 아끼려는 게 재검토의 숨은 의도라면 잘못된 생각이다. 중앙감염병병원이 아니라 ‘삼성감염병병원’을 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탓이다. 감염병 치료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수 없는 대표적인 시장 실패 분야이고 국가의 책무 영역이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보건복지부는 기재부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기재부는 인건비와 유지비 걱정만 하는 것 같다”라며 “정말 잘 만들어야 하고, 또 잘 만들 수 있는 병원인데 정부의 소극적 태도가 너무나 아쉽다”고 말했다.
○ ‘세계 최고’ 비전부터 세워야
그럼 점에서 지금 논의에는 더 중요한 핵심 내용이 빠져 있다. 이 회장의 유족은 기부 약정서에 특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감염병병원을 지어 달라’는 당부를 넣었다. 최신 시설과 비싼 장비를 갖췄다고 해서 최고의 병원이 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없던, 아무도 이뤄 보지 못한 일을 해내야 최고의 병원이 된다. 그런 병원이 되기 위한 비전을 먼저 찾아야 한다.
비전이 제대로 세워지면 세계 최고의 인재가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젊은 의료진과 연구자들에게 ‘이곳에서라면 10년 후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젊은 과학자들이 몰려들던 1954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나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그랬다. 이재갑 한림대 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각 분야 최고 인재가 운집하려면 무엇보다도 병원의 위상이 중요할 것”이라고 했다.
○ ‘비대면 진료-백신 허브’ 토의 시작하자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