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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인사이트]표류하는 감염병병원… 정부, 5000억 기부받고도 사업 미적

입력 | 2021-09-07 03:00:00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지지부진



2026년 중앙감염병병원이 들어설 서울 중구 방산동 옛 미군 공병단 터.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은 올 4월 ‘세계 최고 수준의 감염병병원을 지어 달라’며 병원 건립에 5000억 원을 기부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2014년 12월 ‘치명률 90%’의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한국 정부가 의료진을 파견했다. 목숨을 건 임무였지만 10명 모집에 145명이 모일 정도로 자원자가 많았다. 그런데 파견 한 달도 안 돼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국 의료진 1명이 환자 채혈 중 주삿바늘에 찔린 것. 감염이 우려됐지만 한국으로 데려오지 않고 독일 병원으로 보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단 하나, 한국에는 에볼라를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다. 그때 시에라리온에 갔던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생명이 위험해져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팠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에볼라는 국내에서 퍼지지 않았고, 독일로 이송된 의료진은 건강을 되찾았다. 하지만 감염병에 걸린 국민을 책임질 감염병 전문 의료기관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에볼라 종식과 함께 잊혀지는 듯했다.》




○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부로 새 국면

감염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국립병원 설립 논의는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뒤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 정부는 같은 해 9월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방침을 발표했다. 국회의 예산 삭감과 건립 예정지 주민의 반대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18년 12월 마침내 계획이 확정됐다. ‘1294억 원을 들여 100병상 규모의 중앙감염병병원을 2026년 준공하겠다’는 계획이다.

당시로서는 100병상 규모가 중앙감염병병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국내 메르스 확진자가 2018년 해외에서 유입된 1명을 제외하고 총 186명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우리에게 필요한 감염병 대응 역량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6일 0시 현재 격리 중인 국내 코로나19 확진자는 2만5756명이다. 4차 유행이 이어지며 확진자가 빈 병상을 찾지 못해 숨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올 4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이 “감염병 위기 대응에 써달라”며 정부에 7000억 원을 기부했다. 정부는 이 중 5000억 원을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2000억 원은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 감염병 연구에 쓰기로 했다. 중앙감염병병원에 쓸 수 있는 돈이 기존의 4배 가까이로 늘어난 것이다.

○ ‘기존 예산’ 놓고 5개월째 씨름

기부금이 들어왔으니 병원 건립에 속도가 붙어야 마땅했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가 “거액의 기부금이 새로 들어왔으니 기존 사업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집 앞에 샛길을 내려고 했는데 그 옆에 4차로가 뚫렸다면 원래 있던 ‘샛길 예산’을 어찌 할지 다시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사업 계획을 재검토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다.

정부 예산을 아끼려는 게 재검토의 숨은 의도라면 잘못된 생각이다. 중앙감염병병원이 아니라 ‘삼성감염병병원’을 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탓이다. 감염병 치료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길 수 없는 대표적인 시장 실패 분야이고 국가의 책무 영역이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보건복지부는 기재부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기재부는 인건비와 유지비 걱정만 하는 것 같다”라며 “정말 잘 만들어야 하고, 또 잘 만들 수 있는 병원인데 정부의 소극적 태도가 너무나 아쉽다”고 말했다.

건립 계획을 재검토한다면 메르스 유행 규모를 고려해서 세웠던 기존 설계가 지금도 유효한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게 타당하다. 코로나19의 전례 없는 대규모 유행을 감안하면 중앙감염병병원은 △치료법 개발·보급 △병상 배분 △국제 협력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오히려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후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걸 전제로 국내외 감염병 의료진 네트워킹의 중심이자 ‘재난 예비군’ 훈련소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하자는 의미다.

○ ‘세계 최고’ 비전부터 세워야

중앙감염병병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모(母)병원이 될 국립중앙의료원의 역량도 뒷받침돼야 한다. 세계 최고로 꼽히는 싱가포르의 국립감염병전문센터는 330병상인데 그 모병원인 탄톡셍 병원은 1700병상이 넘는다. 국립중앙의료원은 확장 이전해도 600병상에 불과하다. 병상 규모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의료진, 행정진의 실력도 지금보다 훨씬 향상돼야 한다.

그럼 점에서 지금 논의에는 더 중요한 핵심 내용이 빠져 있다. 이 회장의 유족은 기부 약정서에 특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감염병병원을 지어 달라’는 당부를 넣었다. 최신 시설과 비싼 장비를 갖췄다고 해서 최고의 병원이 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없던, 아무도 이뤄 보지 못한 일을 해내야 최고의 병원이 된다. 그런 병원이 되기 위한 비전을 먼저 찾아야 한다.

비전이 제대로 세워지면 세계 최고의 인재가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젊은 의료진과 연구자들에게 ‘이곳에서라면 10년 후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젊은 과학자들이 몰려들던 1954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나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그랬다. 이재갑 한림대 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각 분야 최고 인재가 운집하려면 무엇보다도 병원의 위상이 중요할 것”이라고 했다.

○ ‘비대면 진료-백신 허브’ 토의 시작하자

중앙감염병병원을 일단 감염병 환자가 입원하고 나면 로봇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검사 투약 수술을 하는 비대면 병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도 나온다. 감염병병원의 문제인 의료진 감염을 막고 국경을 넘나드는 원격 감염병 진료 기술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한 ‘글로벌 백신 허브’의 중심이 바로 중앙감염병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오명돈 교수)도 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 국립중앙의료원은 조만간 기부금관리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앙감염병병원 건립 방향을 논의할 방침이다. 기부금관리위원회는 기부금을 관리하고 운용할 권한을 가진다.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신영수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위원장을 맡기로 한 만큼 넓은 시야로 방향을 잡아주길 기대한다. 먼저 일선 감염병 전문가들이 백가쟁명식 토의를 통해 중앙감염병병원의 비전을 건설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길 바란다.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