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니스 마틴 ‘가브리엘’, 16㎜ 영화, 78분. ⓒ Estate of Agnes Martin
송화선 신동아 기자
“그는 늘 이 세상을 놀라워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올리버 색스: 그의 생애’(릭 번스 감독)를 보다 이 설명이 나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 색스(1933∼2015)를 소개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을 듯했다.
색스는 의사이고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펴내는 책마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글엔 사람 뇌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어 하는 과학자 특유의 집요함이 서려 있다. 동시에 고통받는 인간을 외면하지 못하는 의사의 따뜻한 시선도 공존한다. 탁월한 이야기꾼인 색스는, 이 두 요소를 조화롭게 글로 풀어낼 줄 알았다. 다큐 속에서 색스의 지인들은 그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환자를 만나고, 글을 썼다고 증언한다.
영화는 미국 뉴욕에 있는 색스의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그는 불과 몇 주 전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참이다. 자기 앞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색스는 세상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책을 쓰고자 자료를 뒤적이고, 바흐의 피아노곡을 연습한다. 색스가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빛내며 주위 사람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장면을 보다 문득 애그니스 마틴(1912∼2004)의 ‘가브리엘’(1976년)이 떠올랐다.
‘가브리엘’은 추상화가로 유명한 마틴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영상 작품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바다 앞에 선 한 소년의 뒷모습에서 시작해 대자연 곳곳으로 옮겨간다. 평화로운 숲길, 맑은 시내를 지나 바람에 휘날리는 야생화를 클로즈업할 때는 영상에서 가벼운 흔들림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을 직접 촬영한 마틴은 생전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무겁지는 않았다. 다만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전율 때문에 손이 떨렸다”고 고백했다.
1976년이면 화가가 이미 6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다. 회화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은 뒤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틴은 여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설렜고, 그 기쁨을 남기고자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가브리엘’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소리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마틴 또한 색스 못잖게 바흐를 사랑했다. 그는 이 음악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의 환희를 표현한 듯하다.
지긋지긋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발이 꽁꽁 묶인 지 1년이 넘었다. 그래도 여전히 색스의 글을 읽고, 마틴의 그림을 보고,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 경탄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머잖아 몸으로 마음으로 다시 느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