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가 1923년 그린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의 초상화(왼쪽 사진). 자먀틴의 ‘우리들’은 ‘멋진 신세계’와 ‘1984’에 영감을 준 소설로 꼽힌다. 오른쪽 사진은 러시아 레베댠에 있는 자먀틴의 생가 기념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비운의 천재 예브게니 자먀틴(1884∼1937)은 돈 강 유역의 작은 마을 레베i에서 정교회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이과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페테르부르크종합기술대 조선학부를 졸업한 후 볼셰비즘을 지지하는 문학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곧 환멸로 바뀌었다.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집단화와 획일화에 절망한 자먀틴은 전체주의를 신랄하게 꼬집는 공상과학소설(SF) ‘우리들’을 집필했다. 소설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뻔뻔스러운 비난으로 간주되었고 그에게는 반혁명의 낙인이 찍혔다.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망명한 자먀틴은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들’은 이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등 무수한 소설에 영감을 주면서 현대 디스토피아 문학의 원조로 우뚝 솟아올랐다.》
첨단과학 감시사회 ‘단일제국’
‘우리들’의 배경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첨단 과학기술과 절대권력을 무기로 건설하는 ‘단일제국’이다. 모든 국민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며 똑같은 청회색 제복을 입고 똑같은 인공 음식을 먹으며 동일한 규격의 아파트에 거주한다. 과학문명의 정점에 오른 단일제국에서 모든 비합리적인 것, 감상적인 것은 이성과 효율로 대체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최고의 안전과 평화를 제공한다. 주인공 D-503 역시 통제와 감시와 안전에 익숙해진 삶을 살면서 단일제국의 발전을 위한 우주선 건조에 투신한다. 그러나 어느 날 I-330이라는 여성 번호가 그 앞에 나타나면서 그의 유리처럼 “매끄럽고 견고하고 행복한”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성은 그의 내면에 있는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여 단일제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본능적인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반체제 혁명 세력의 주모자로 주인공의 우주선을 접수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통제된 행복 대신 불안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의 물결에 동참한다.
현대 디스토피아 문학의 원조
1924년 영어로 번역돼 출간된 ‘우리들’의 초판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보 제공에 “모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안전과 사생활 침해 간의 무게를 저울질하느라 머뭇거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점점 더 정교화되고 지능적으로 발달해 가는 디지털 전체주의에 엄중한 경고를 해온 ‘감시연구(Surveillance Studies)’ 전문가들도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우리’ 아닌 ‘나’의 눈으로 보라”
자먀틴 역시 개인의 자유가 전체 구성원의 물리적 안녕보다 앞서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단일제국을 전복시키려던 봉기는 진압되고 주모자는 처형당하고 주인공은 세뇌 수술을 받아 다시 원래의 ‘온건한’ 번호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결코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소설이 아니다. 주인공이 ‘우리’가 아닌 ‘나’로서의 자아, 번호가 아닌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단일제국의 맨 밑바닥에서는 주인공처럼 ‘나’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먀틴은 여기서 다시 유리를 소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시의 상징인 유리가 개인의 내면에 적용될 때 통찰의 상징이 된다. “나는 유리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내부를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내가 있었다. 하나는 이전의 나, 이전의 D-503, 번호 D-503. 또 다른 하나는….” 주인공은 고뇌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만 있다면.” 고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파헤치는 동안 주인공은 수많은 번호 중 하나가 되는 것에서 벗어난다. 그는 ‘우리’의 틀을 부수고 나와 처음으로 ‘나’가 된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난생 처음 나 자신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 내가 있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