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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철 작가, 15평 작업실서 드로잉展 여는 까닭은?

입력 | 2021-09-10 03:00:00

‘창성동 실험실’ 운영 이기진 교수와
李교수 대학시절 사제의 인연
서울역 노인 얼굴, 들꽃 등 전시
“저평가된 드로잉의 가치 재조명”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권순철 작가(오른쪽)의 개인전 ‘흔적 Trace’을 관람하러 온 이기진 교수.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서울 종로구 창성동 샛길을 걷다 보면 빼꼼 모습을 드러낸 작은 한옥. 성인 여성 키만 한 노란색 문 옆에는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작은 녹색 팻말이 붙어 있다. 종종 전시를 여는 이 공간에서는 현재 전시 ‘CHEOL’이 열리고 있다. 장소만큼이나 비밀스럽게 열리는 듯한 이 전시에서는 한국인의 원형을 찾는 작가, 권순철(77)의 작품 55점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이 장소에서 전시를 연 데에는 이유가 있다. 창성동 실험실을 운영하는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61)가 그의 제자다. 가수 CL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이 교수는 미대 진학을 꿈꿨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다. 대학 시절 그가 이화여대와 서강대 합동 미술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인연은 시작됐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동아리 지도교수로 있었던 권 작가는 “평일 방학 할 것 없이 방방곡곡을 다니며 스케치하고 도자기를 구웠는데 미대 강의보다 재밌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대학 시절을 황금 같은 시간으로 만들어주신 애틋한 선생님”이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7월 권순철 작가가 서울역을 찾아가 그린 ‘서울역’. 현장을 방문하면 하루 약 20장의 얼굴을 그린다고 한다.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이번 전시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예술가의 삶을 살고 계신 것 같다”는 이 교수의 말처럼 권 작가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대학 시절, 권 작가는 영등포역에 가 노인들의 얼굴을 그렸다. 6·25전쟁으로 아버지와 삼촌을 여읜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축한 얼굴에 집중했다. “한국인의 얼굴을 잘 표현하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승화시키는 얼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올해 7, 8월 그는 서울역에 나가 그때와 같이 드로잉을 했다. 작품 ‘서울역’을 보면 마스크를 쓴 노숙인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시대상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제는 젊은이들의 얼굴도 살펴보려 한다”며 앞으로의 과업을 고민했다.

‘들꽃’은 권순철 작가가 서울 종로구 서촌 자택 인근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꽃을 그린 그림이다.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그의 드로잉은 기초 작업으로 간주되어 온 드로잉에 관한 색안경을 벗게 한다. 인왕산을 산책하며 발견한 꽃을 그린 작품 ‘들꽃’ ‘무궁화’의 획들은 단순히 재현을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리듬감을 품은 작가의 동작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전시는 대작 유화보다는 스케치북에 그린 드로잉들이 주가 됐다. “15평 정도인 협소한 공간을 관람객이 편안하게 느꼈으면 한다”는 의도도 있지만 “한국에서 저평가되는 드로잉의 가치를 조명하고 싶었다”는 게 기획자이자 권 작가의 딸인 권정원 씨(35)의 설명이다.

이제껏 ‘얼굴’ ‘예수’ ‘넋’ 등 하나의 테마에 집중한 것과 달리 작가를 상징하는 여러 요소들이 모두 섞여 있는 점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작품 ‘등’은 고문, 태형을 당한 역사를 생각하며 그린 누군가의 등이다. 권 작가는 “인체에도 역사성과 표정이 있다”고 말했다. 누드 드로잉 5점은 작가가 매주 참여하는 드로잉 모임에서 만들어 온 작품들 중 일부다.

프랑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권 작가는 약 2년 만인 다음 달에 파리로 간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이강소, 오천용 작가와 같은 공간에서 3인전을 열 계획이다. 권 작가는 “서촌에서 이강소와 함께 작업실을 썼던 1964년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일까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