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성동 실험실’ 운영 이기진 교수와 李교수 대학시절 사제의 인연 서울역 노인 얼굴, 들꽃 등 전시 “저평가된 드로잉의 가치 재조명”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권순철 작가(오른쪽)의 개인전 ‘흔적 Trace’을 관람하러 온 이기진 교수.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서울 종로구 창성동 샛길을 걷다 보면 빼꼼 모습을 드러낸 작은 한옥. 성인 여성 키만 한 노란색 문 옆에는 ‘창성동 실험실’이라는 작은 녹색 팻말이 붙어 있다. 종종 전시를 여는 이 공간에서는 현재 전시 ‘CHEOL’이 열리고 있다. 장소만큼이나 비밀스럽게 열리는 듯한 이 전시에서는 한국인의 원형을 찾는 작가, 권순철(77)의 작품 55점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이 장소에서 전시를 연 데에는 이유가 있다. 창성동 실험실을 운영하는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61)가 그의 제자다. 가수 CL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이 교수는 미대 진학을 꿈꿨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다. 대학 시절 그가 이화여대와 서강대 합동 미술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인연은 시작됐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동아리 지도교수로 있었던 권 작가는 “평일 방학 할 것 없이 방방곡곡을 다니며 스케치하고 도자기를 구웠는데 미대 강의보다 재밌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대학 시절을 황금 같은 시간으로 만들어주신 애틋한 선생님”이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7월 권순철 작가가 서울역을 찾아가 그린 ‘서울역’. 현장을 방문하면 하루 약 20장의 얼굴을 그린다고 한다.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들꽃’은 권순철 작가가 서울 종로구 서촌 자택 인근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꽃을 그린 그림이다. 권정원 씨·이기진 교수 제공
이제껏 ‘얼굴’ ‘예수’ ‘넋’ 등 하나의 테마에 집중한 것과 달리 작가를 상징하는 여러 요소들이 모두 섞여 있는 점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작품 ‘등’은 고문, 태형을 당한 역사를 생각하며 그린 누군가의 등이다. 권 작가는 “인체에도 역사성과 표정이 있다”고 말했다. 누드 드로잉 5점은 작가가 매주 참여하는 드로잉 모임에서 만들어 온 작품들 중 일부다.
프랑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권 작가는 약 2년 만인 다음 달에 파리로 간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이강소, 오천용 작가와 같은 공간에서 3인전을 열 계획이다. 권 작가는 “서촌에서 이강소와 함께 작업실을 썼던 1964년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일까지.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