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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9·11, 세상의 끝에서 부르는 이름

입력 | 2021-09-12 17:40:00


9·11테러는 내 인생도 바꿔놓았다. 20년 전 그날, 나는 맨해튼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인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 있었다. 그날따라 오전 9시 강의에 늦게 도착한 교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It‘s War!”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다. 방문연구학자로 미국 연수를 온 상태였지만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기사를 써야 한다!

다음 날, 마침 생일을 맞은 6학년 딸을 혼자 집에 두고 나는 맨해튼으로 갔다.

2001년 9월 11일 비행기가 충돌한 직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미국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뒤쪽). 앞쪽에 뉴욕의 랜드마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인다. 뉴욕=AP 뉴시스



“폼페이 최후의 날이 이랬을까. 자본주의를 상징했던 빌딩의 잔해는 참혹했다. 110층 타워를 지탱하던 강철은 롤러코스터의 레일처럼 휘어져 있다. … 연기 속에서 구조대원들은 마스크도 벗어던진 채 생존자를 한 명이라도 더 찾기 위해 열심이었다. …”(2001년 9월 14일 동아일보)

● 기자로서 미안한 행운 9·11테러
기자들은 알겠지만 큰 사건을 만난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다. 특히 미국 연수 전까지 생활부 편집부 문화부에서만 일했던 나는 한계를 시험해 볼 기회조차 못 가진 기자였다(정치.경제.사회부 같은 부서에서 일해보지 못했다는 소리다. 슬프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 남기자들과 달리 여기자들은 대개 그랬다).

그때만 해도 뉴욕엔 특파원이 없었고 나는 맨해튼과 그중 가까운 데 살았다. 기자 본능대로 세계사가 바뀌는 현장을 취재하면서 내 안의 월드트레이드센터도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세우는 경험을 동아닷컴에 ’김순덕의 뉴욕일기‘로 전했다(덕분에 논설위원이 될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9.11 테러 직후 뉴욕 현장 르포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2001년 9월 14일자 지면.



책으로 출간된 ’마녀가 더 섹시하다‘를 오늘 아침 다시 보니 글발은 그때가 더 나은 것 같다. 9·11테러 직후 미국의 미세한 변화를 쫄깃하게, 때론 톡 쏘듯 썼다 싶다. 지금 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지정학적 변화를 논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일상의 소중함과, 그 일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미국의 가치로 하나 돼 있었다.

● If Only… 죽기 전에 우리가 볼 수 있다면
2001년 9월 말 뉴욕타임스는 뉴욕 시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월드트레이드센터 붕괴로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친구를 잃었다고 전했다. 월드트레이드센터 희생자가 2753명.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 중에 변을 당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죽음이 예감되는 이 세상 끝에서 그들이 안타깝게 부른 이름은 가족이었다. 가족이 희생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히려 살아남은 것을 괴로워하고 죄스러워했다. 그날 아침 부부싸움을 안 했더라면… 사랑한다고,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직장에 다니지 말라고 진작 말릴 걸…. ’If Only‘라고 불리는 마음의 병이다.

9.11 테러 20주기인 11일 추모행사에 참석해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유족과 지인들. 뉴욕=AP 뉴시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부쩍 늘었다. 아무리 원수 같다 해도 죽기 전에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내 딸, 내 아들, 그리고 내 부모라는 깨달음에 뉴욕 사람 모두가 가족천사로 변한 듯했다.

● 우리는 모두 같이 살아야 할 사람들
그때 얻은 교훈이 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그때그때, 말로 또 친절한 태도로 표현하지 않으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가장 만만한 것이 가족이다. 특히 딸들은 엄마를 우습게 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바로 그 시기에 우리는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해야 했다(지금처럼 마음 놓고 만날 수 없는 코로나 시국이 닥칠지 미리 알았나 말이다).

어디 내 가족들뿐이랴. 설령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다. 또 미국인뿐이랴. 무슬림도, 흑인도, 아시안도, 당연히 여성도 함께 살아야만 한다(좀 더 확대하면 어려워진다. 중국인도, 북한 주민도 결국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9.11 테러 20주기인 11일 미국 뉴욕 국립 9.11메모리얼&뮤지엄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두 갈래 빛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 사람을 존중 않는 지도자는 반대다
9·11테러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9·11로부터 불과 63일 만에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20년 후 그 탈레반이 다시 아프간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과 국가 건설‘ 20년이 헛되고 헛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한 생명이 스무 살에 죽었다고 20년간 살아온 삶이 헛되다고 할 순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 경험을 안 해본 것보다 낫다. 아프간 탈출에 목숨 건 사람들이 증거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같이 미국이 제공한 가치는 사람 사는 세상에 너무나 중요하다.

20년 전 “미국의 미션은 문명과 야만 사이의 투쟁을 이끄는 것”이라고 조 바이든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선언했다. 어떤 종교든, 또는 이데올로기든 내 가족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야만이다. 탈레반 정권이 그랬다. ’악의 축‘이란, 이라크, 북한은 물론 9·11 최대 수혜자 중국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같이 살긴 살아야겠지만 미국보다 중국의 가치를 따라가는 문재인 보유국이 그래서 걱정스럽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