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박물관 무령왕릉展 오늘 개막
국립공주박물관의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도입부에 전시된 ‘청동받침 은그릇(동탁은잔)’. 15cm 높이의 금속 공예품으로 도가 사상을 반영한 산봉우리와 용, 봉황 등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금과 은으로 겹겹이 장식된 연꽃 주위를 산봉우리와 능선이 휘감는다. 네 개의 봉우리 사이에는 봉황과 사슴이 세밀한 필선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과 결합된 그릇에는 연꽃 위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세 마리 용이 빙 둘러싸고 있다. 1971년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받침 은그릇(동탁은잔·銅托銀盞)’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를 연상시킨다. 금동대향로도 역동적인 용틀임과 피어오르는 연꽃무늬가 절묘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15cm 높이의 화려한 동탁은잔이 은으로 만든 뚜껑과 그릇, 청동받침으로 구성돼 있다면 금동대향로는 금동 뚜껑과 받침이 한 세트를 이룬다.
발굴단이 내부에 진입한 직후 연도(무덤길)에서 발견한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국립공주박물관·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령왕이 머리에 쓴 관꾸미개(왼쪽)와 허리에 찬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의 손잡이.
1971년 7월 8일 오후 발굴단이 무덤 앞 막음벽돌을 들어내는 모습.
이번 전시에선 20세기 최대 고고 발견으로 평가되는 무령왕릉 발굴이 졸속으로 진행된 뼈아픈 역사도 조명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보수공사 중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된 날인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김영배 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이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이번에 전시된 보고서에서 김 분관장은 “귀중한 유적인 만큼 시급히 조사 작업을 진행치 않으면 도굴 및 파괴의 우려가 있으니 긴급 조치 바람”이라고 썼다. 이에 따라 무령왕릉 유물 수천 점은 출토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채 이틀 만에 부대에 실려 옮겨졌다.
“졸속발굴 아픔… 과학분석 통한 새 성과 다행”
발굴 참여 지건길 前중앙박물관장“부대에 담아 이틀 만에 발굴 끝내… 2년후 천마총 발굴때 반면교사로”
발굴보고서 등에 따르면 1971년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이어 이틀 뒤인 7일 오전 발굴에 들어가 이튿날 오후 10시부터 유물 수습이 시작됐다. 발굴단은 밤새도록 5000여 점의 유물을 부대에 퍼 담아 외부로 옮겼다. 이 작업이 모두 종료된 게 9일 오전 9시. 발굴에 착수한 지 만 이틀 만이었다. 이에 따라 일부 유물은 정확한 출토 위치를 몰라 성격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다. 무덤 바닥에서 대거 쓸려나온 수많은 금속 장식들이 대표적이다.
지 전 관장은 무령왕릉 발굴 당시 28세의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 학예연구사였다. 발굴단장이자 국립박물관장이던 삼불 김원룡 교수는 그의 서울대 고고학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하늘 같은 스승에게 ‘차근차근 조사하자’고 직언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무령왕릉 발굴 성과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수습된 유물들에 대한 과학 분석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는 “2001년부터 유물에 대한 정밀 조사가 이뤄져 ‘신(新)보고서’ 발간으로 이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몇 해 전 경주 월성 발굴 속도전 논란과 맞물려 “학술 발굴이 차근차근 이뤄질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주=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