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새로 사귄 친구 네 명이 서울 뒷골목 카페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갔다가 그들과 함께 동생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을 때 누군가 게임을 하자고 했다. 시인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벌주게임을 제안했다. 각자 돌아가면서 해보지 않은 것을 말하면, 그런 적이 있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게 규칙이다. 보통 우스운 얘기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솔직하고 때로는 성적인 얘기로까지 번지는 게임이다. 익숙하지 않은 게임이라 그가 시범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이 선수를 쳤다. “나는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그런데 모두가 벌주를 마셔야 했다. 누구나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거다. 웃자고 시작한 게임이 그들 안에 감춰진 상처와 고통을 순식간에 들춰내고 말았다.
한국계 미국시인 캐시 박 홍이 퓰리처상 후보작이었던 ‘마이너 필링스’(소수적인 감정)라는 에세이집 말미에서 회고한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 것은 삶이 고단하긴 어디서나 마찬가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백인이 만든 인종적 틀에 맞춰 살아야 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 방황하고 고뇌하고 절망하면서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삶의 고단함.
어찌 젊은이들만의 일이랴.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누구든 죽음과 관련한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살려는 의지가 죽으려는 의지를 이겨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쩌면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 시인이 글을 쓰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껴안고 또 그들로부터 껴안아지기 위해서다. 스스로도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독자의 마음이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흔들리는 이유다. 타인의 상처에서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는 거다. 상처가 서로를 묶어준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