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전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를 찾아 학생들이 실제로 어떻게 공부하는지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쓴 영어 에세이의 첫 문장이 취재수첩에 아직 남아 있다. 그 학생이 혼자 운동장 트랙을 돌며 지난 학교생활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밤이 두 팔로 지평선을 감싸면 가로등 빛은 더욱 밝아져 구석구석과 틈까지 비춘다(As the night wraps her arms around the horizon, the street lamps glow ever brighter, revealing every corner and cranny).’
▷사재 1000억 원을 들여 민사고를 세우고 키운 최명재 파스퇴르 회장은 국내 대학교육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해 노벨상을 받을 사람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민사고에는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이 있다. 최 회장은 국내 진학반을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당장 유학 갈 여건이 안 되는 영재를 모른다 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민사고는 학부 과정에서부터 유학할 학생을 길러내는 데 주력했다.
▷민사고는 1999년부터 올해까지 하버드대 13명, 예일대 20명 등 985명을 해외 유명 대학에 진학시켰다. 197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유학은 주로 국내에서 대학을 마치고 해외에서 석박사 과정을 하는 것이었다. 민사고를 시발로 외고 과학고 등에 해외유학반이 생기고 나서야 학부 과정부터 해외에 나가서 하는 글로벌 인재 육성 코스가 복원됐다. 이런 교육의 첫 수혜자인 30대 후반이 사회 곳곳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민사고는 파스퇴르유업이 부도가 나 재정 지원을 중단한 후 학비가 비싼 학교가 됐다. 민사고는 정부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정부가 학교를 지원해 비싼 학비를 못 낼 형편의 학생도 능력이 있으면 들어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형을 만들면 불평등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내버려두면 잘 굴러갈 학교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 양식이 있다면 보태주는 건 못해도 최소한 망하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