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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드러나도 진실 외면하는 세태

입력 | 2021-09-16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읊다]〈24〉알레고리와 진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가 선박 사고 원인 조사원들에게 배가 난파한 뒤 살아남은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20세기 스튜디오 제공


리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년)에서 소년 파이는 선박회사 사고 원인 조사원들에게 배가 난파된 뒤 망망대해에서 홀로 살아남게 된 과정을 이야기한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 복위를 도모했다는 무고로 잡혀온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국문을 담당한 정승에게 자신의 진실을 담은 시를 들려준다.



이 시는 1623년 강원 철원 보개산 절의 벽에 썼던 것이다.(‘題寶蓋山寺璧’) 늙은 과부가 주변의 재가 권유를 강하게 거절하는 내용이다. 유몽인은 국문을 받으며 자신이 인조반정 이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떠돌았던 일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어 수양산에 숨어 산 백이·숙제에 빗댔다. 심문하던 정승이 그의 처신을 힐난하자 시인은 결연히 이 시가 죄가 된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했다.(‘연려실기술’)

영화 속 파이는 조사원들에게 구명정에 함께 탄 호랑이,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과 표류했던 일을 진술한다. 조사원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듣곤 믿을 수 없다며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파이는 결국 하이에나는 배의 나쁜 주방장이고, 얼룩말과 오랑우탄은 그에게 살해당한 선원과 어머니, 그리고 리처드 파커란 이름의 호랑이는 주방장에게 응징을 가한 자신임을 암시한다. 시인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지만 시에서 죽은 남편은 광해군, 주변에서 권유하는 잘생긴 남자는 인조, 과부는 바로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호랑이처럼 한시의 과부는 알레고리의 핵심이다. 시 속 칠십 먹은 과부와 몸 파는 기생은 원나라 양유정(楊維楨)의 ‘노객부요(老客婦謠)’란 시에서 연유한 것이다.(‘성호사설’) 양유정 역시 원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나라에 출사하길 거부했다. 유몽인의 시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밝히는 어조가 더욱 강하다.

영화와 한시 모두 알레고리의 실체가 드러났을 때 그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조사원들은 침몰한 배처럼 진실 역시 인양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인조반정의 공신들 역시 뒷날 화근이 될까 염려해 유몽인의 사형을 밀어붙였다.

영화는 ‘강렬한 시각적 우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몽인의 한시는 ‘격렬한 진실의 우언’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시를 읽으며 권력자로부터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지식인의 서글픈 운명을 생각해 본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