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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였다 감염땐 되레 불효”… 테이크아웃 음복-SNS 제사

입력 | 2021-09-16 03:00:00

[새로 쓰는 우리 예절 2021 新禮記]〈1〉종가-전문가 “새 예법 세울때”
추석맞이 새 예법 논의 어때요



도포-두건 갖춰입고 ‘랜선 제사’ 참관 관(冠)을 쓴 퇴계 선생의 후손들은 화상으로 제사를 지켜봤다(오른쪽 사진). 퇴계 선생 종가는 “마음만 있으면 형식의 변화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제공 



위드 코로나 시대… 종가들도 ‘줌 제사’

매년 1월 경북 안동에선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는 제사가 열린다. 후손과 학자 등 수백 명이 퇴계 종택에 모인다. 하지만 450주기였던 올해 제사는 달랐다. 소수의 제관이 종택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머지는 각자의 집에서 PC나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비대면 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통해 모니터 안에서 예를 갖췄다.

퇴계 이황 선생의 경우 나라가 선생의 업적을 인정해 사후에 영원히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허락했다. 이를 불천위(不遷位) 제사라고 한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고, 종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450년 동안 이어진 제사까지 바꿔 놓았다. 퇴계 종가가 변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형식만 강조하다 전염병이 퍼지면 더 큰 불효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지 1년 10개월. 다가올 추석까지, 벌써 세 번째 ‘코로나 명절’이다. 퇴계 종가처럼 이제 집안마다 나름의 ‘거리 두기 명절’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 종가는 최근 후손 대표들이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참여해 사당 수리 안건을 의논하기도 했다. 종가와 제례 전문가들은 이제 ‘응급 처방’으로 명절을 지내기보다 ‘위드(with) 코로나’에 맞는 새로운 예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가족마다 상황에 맞는 예법, 바로 지속 가능한 ‘신예기(新禮記)’다.



“모였다 감염땐 되레 불효”… 테이크아웃 음복-SNS 제사
조상 기리는 동시에 거리두기, 집집마다 맞춤형 예법 마련
류성룡 선생 종가, 제사 규모 축소… 80명 모이던 ‘불천위’ 10명이 지내
이황 선생 종가는 비대면 제사… ‘퇴계 450주기’ 땐 줌 제사 도입
“가족의 소중함이란 본질 지키되, 현실 변화 반영해 전통 이어가야”




“지난 명절까지는 12명이 한번에 제청(祭廳·제사를 지내는 대청)에서 잔을 올렸는데, 앞으로는 1명씩 들어가기로 했어요. 제관들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니까요.”

15일 오전 경북 칠곡군 석담 이윤우 선생의 사당 앞 잔디밭에는 천막 두 개가 들어섰다. 이날 석담 선생의 불천위(不遷位·나라에 세운 공이 커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구히 제사 지내는 것이 허락된 것) 제사를 앞두고 마련된 제관들의 거리 두기 공간이다. 16대 종손 이병구 씨(69)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누그러지지 않은 상황에서 집안 최대 행사의 ‘밀집도’를 조절하기 위해 이 같은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서 조상을 기리는 동시에 감염을 막기 위한 거리 두기 방법”이라며 “편법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예(禮)를 지키려는 묘안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석담 종가는 지난 설에도 한자리에 모여 음복을 하는 대신 사당을 찾은 종친에게 ‘테이크아웃’ 음복 도시락을 나눠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씨는 “코로나19로 시작된 형식의 변화는 앞으로 계속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 코로나19로 비대면 제사-전자서명도 등장

이젠 노트북 모니터 향해 절 올리고… 올 1월 ‘줌’을 통해 비대면으로 진행된 450주기 불천위 제사 모습.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제공 

지난해 초 시작된 코로나19는 전통을 유지하려 애써 온 종가의 예법을 바꿔 놓고 있다. 전국의 종가들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명절 행사 규모를 줄였다. 명가 자부심의 원천인 불천위 제사도 마찬가지다.

서애 류성룡 선생 종가가 있는 안동 하회마을보존회는 지난해부터 명절과 제사를 축소해 지내고 있다. 류한욱 하회마을보존회 이사장은 “불천위 제사는 기본적으로 80여 명이 모이는데, 지난해부터 10여 명으로 규모를 줄였다”며 “제사 형태는 현재 상황에 맞춰서 하는 것이지, 예전부터 해 오던 것이라고 위법(違法)까지 하며 계속할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이전에 없던 장면이 등장했다. 퇴계 이황 선생 종가가 올 1월 퇴계 선생 450주기 불천위 제사 때 시행한 ‘비대면 제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퇴계 종가는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ZOOM)’을 사용해 제사를 진행했다. 반대하는 문중은 없었다. 퇴계 선생 17대 종손 이치억 씨(45)는 “아쉬운 마음은 컸지만 모두 ‘방역수칙을 어기다 병이 퍼지면 그것이 불효’라며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열리던 문중 어르신 회의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체대화방이 활용되고 있다. 전남 해남군 고산 윤선도 선생 종가는 최근 사당을 수리하는 안건을 SNS로 논의해 결정했다. 고산 선생 15대 종손 윤성철 씨(55)는 “대면 회의가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방법”이라며 “의사 결정도 전자서명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 “형식은 시대 따라 변하는 것”

예전엔 문중 다 모였는데… 코로나19 유행 이전에 열렸던 퇴계 이황 선생 종가의 불천위(不遷位) 제사 모습.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제공 

코로나19로 시작된 변화는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윤 씨는 “기존 방식이 변할 것이라는 얘기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 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서 “SNS, 영상통화 등으로 예를 보존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내 뿌리를 되돌아보는 명절의 본질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형식은 시대적 흐름과 문화 속에 끊임없이 변해 왔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가족 모임이 설과 추석에 집중된 것도 결국 시대 변화에 맞춰진 결과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단오(端午), 백중(百中), 중양절(重陽節) 등을 모두 명절로 챙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 사는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명절의 의미와 무게감은 고향에 갈 수 있는 ‘휴일 있는 명절’로 집중됐다. 지금처럼 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쉰 것은 1989년부터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명절은 조상과 우리의 공동체 의식, 결속력을 다지는 기회지만 너무 형식에만 얽매이면 가족 구성원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며 “이제는 명절의 의미, 차례를 지내는 이유를 되돌아보며 가족 공동체 의미를 되짚는 기회를 가질 시기”라고 조언했다.

○ “새로운 가가례를 세울 때”

오늘날 만들어갈 신예기(新禮記)는 가족 간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현실을 반영해 만들어야 한다. 퇴계 이황 선생도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현실에 맞게 하되 옛것에 멀리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즉 전통 예법의 기본을 존중하되 그 시대에 합당한 예를 갖춰 정성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시대 흐름에 맞춰 집마다 고유의 예법을 만드는 것이 결국 우리 조상이 지켜온 전통의 명맥을 잇는 방식이다. 과거에도 가문에 따라 신주를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보관하거나 장소를 바꿔 제사를 지내는 일은 흔히 있었다. 집안별로 가가례(家家禮·각 집안의 예법)를 세워 지키는 것이 전례 없던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안승준 한국고문서학회장은 “모두가 참여해서 만드는 인터넷 오픈 백과사전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예법을 만들어가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삶이 이뤄진 현대에 맞는 예법”이라고 강조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대구=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
김대은 인턴기자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졸업
박정훈 인턴기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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