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미국 국방부가 최근 남부 텍사스주 엘패소의 포트블리스 미군기지 안에 마련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임시 수용시설을 공개했다. 생필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이 기지에만 1만 명의 아프간인이 있다. 엘패소=AP 뉴시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계 여성 나질라 잠시디 씨는 최근 연방정부 측 관계자로부터 파슈토어, 다리어 등 아프간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의 통역을 구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지난달 30일 완료된 미군의 아프간 철수 직전 수니파 무장단체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을 탈출해 미국으로 들어온 아프간인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잠시디 씨는 2016년 특별이민 비자를 받아 남편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과거 수도 카불, 서부 헤라트 등에서 미 국제개발처(USAID)의 통역 및 현지 업무를 지원한 공을 인정받았다.》
미국 내 아프간 지역사회에서 폭넓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 잠시디 씨는 즉시 통역을 구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갑작스럽게 아프간을 떠나 미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 못 한다. 이들이 초기에 잘 정착하려면 의식주 등 물적 지원은 물론이고 언어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美‘동맹 환영 작전’
미군 철군 당시 미 수송기 등을 이용해 아프간을 탈출한 사람은 약 12만3000명이며 이 중 70% 이상이 아프간 국적자이다. 현재 미 뉴저지, 텍사스, 버지니아, 위스콘신주 등 미군기지 8곳에 분산 수용된 아프간인만 약 5만 명. 이들은 기지에서 신원 검증은 물론이고 미 질병예방통제센터(CDC)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을 포함한 각종 건강 검사 절차를 밟고 있다.
정계 차원의 지원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백악관은 아프간인의 정착을 위해 64억 달러의 긴급 예산을 의회에 요청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3명의 전직 대통령과 그 배우자 6명은 아프간 난민 재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최근 발족한 비영리단체 ‘웰컴 닷 US(Welcome.US)’의 공동 명예의장을 맡았다. 월마트, 스타벅스 등 대기업도 기금 조성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검증 절차를 완료한 아프간인들은 미 전역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당장 직면할 가장 큰 문제는 ‘집’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아프간인이 대거 유입될 것으로 보이는 수도 워싱턴 인근의 북부 버지니아주는 지금도 주택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주민들이 애를 먹고 있다. 이 지역의 높은 물가를 감안하면 아프간인이 향후 90일 안에 미 정부에서 받을 2275달러(약 262만 원)의 지원금으로는 도저히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어지는 온정의 손길
후원단체들이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물품 중에서는 노트북컴퓨터, 스마트폰, 식료품점 기프트카드 등이 필수 지원품으로 꼽힌다. 법적 도움도 절실하다. 미 정부가 특별이민비자를 약속했지만 절차가 더딘 데다 조건 충족이 안 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으로 고국을 당장 떠나지 못한 아프간 부모들이 카불 공항 경비를 서던 미군에게 던지다시피 해서 미국 땅을 밟은 어린이들은 당장 이들을 돌봐줄 미국인 가정을 찾아야 한다.
남부 아칸소주 주민들은 아프간인에게 식료품 제공, 공항 픽업 등의 자원봉사 활동 신청서를 속속 제출하고 있다. 아칸소 벤턴빌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제시카 진저 씨(39)는 뉴욕타임스(NYT)에 “수천 명의 사람이 갈아입을 옷 한 벌 정도만 간신히 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났을 것”이라며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집과 도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슬람이 美문화 희석” 우려
최근 미국 수도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아프간인 지원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가 ‘당장 아프간인을 구출하라’ 등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나질라 잠시디 씨 제공
보수 진영에서는 아프간인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테러범들을 걸러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야당 공화당 의원 26명은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최대 5만7000명의 아프간인이 미국 시민권 혹은 영주권, 특별이민비자 자격이 없는 상태로 현지를 빠져나온 것으로 추산된다”며 이들 중 일부는 테러 단체 및 범죄 집단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서한을 보냈다.
공화당은 미국에 정착한 아프간인들이 친민주당 성향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내심 우려하고 있다. 당장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스뉴스의 유명 앵커 터커 칼슨은 “이민자들이 미국 문화를 희석시키고 공화당에 해를 입힐 것”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지지자가 될 것이 확실한 아프간인을 선거 판세를 좌우하는 경합주에 정착시켜 중간선거에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