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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와 예술가 ‘브로맨스’ 결말은

입력 | 2021-09-30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읊다]〈25〉왕의 시, 왕의 춤



영화 ‘왕의 춤’에서 륄리(왼쪽)는 루이 14세와 예술적 교감을 나누지만 둘의 관계는 결국 파국에 이른다.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공


한시에는 남자들의 우정을 읊은 시가 많다. 반면 이성 간의 연애 감정을 읊은 시는 드물다. 삼국시대 위나라 유정(劉楨·?∼217)이 쓴 다음 시는 마치 이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시의 화자는 가을날 규방에서 잠 못 이루며 님에 대한 속마음을 적어 본다. 전장으로 떠난 님이 고생하지는 않으실까 눈물까지 흘리며 마음을 졸인다. 남녀의 애달픈 사랑을 다룬 듯한 이 시는 실제론 시인이 벗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 벗은 조조의 차남 조비였다. 당시 조비는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동생 조식과 후계자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미래의 군왕이 될 조비가 고질병에 시달리던 시인을 찾아와 위로했으니 감동할 만도 했다. 시인은 조비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담아 이 시를 바친다고 썼다.(두 번째 수)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 ‘왕의 춤’(2000년)에서도 궁정 음악가 륄리와 루이 14세의 특별한 관계가 그려진다. 실권을 쥔 모후의 그늘 아래 우울하고 고독한 유년을 보내던 루이 14세에겐 음악과 춤만이 위안이었다. 륄리는 위독한 왕을 위해 밤새 음악을 연주하며 신임을 얻고, 왕은 륄리의 음악에 맞춰 춤추며 자신감을 회복해간다.

조비 역시 뛰어난 시인으로 건안칠자(建安七子)로 불리던 당대의 걸출한 문인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유정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 속 륄리와 왕이 음악과 춤을 통해 예술적 교감을 나눴다면, 유정과 조비는 시를 통해 교유했다. 시인이 마치 님을 그리워하는 여성같이 애절한 사랑을 표현한 것처럼, 륄리도 왕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와 예술가의 관계는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유정도 륄리도 권력자와의 대등한 관계를 꿈꿨지만 현실은 달랐다. 륄리가 권력을 되찾은 루이 14세의 외면으로 상처받았던 것처럼, 유정 역시 조비의 아내 견씨에 대한 불경죄로 곤욕을 치렀다.

영화 속 루이 14세는 륄리가 죽은 뒤에야 “왜 음악이 없지?”라고 묻는다. 유정이 돌림병으로 죽은 뒤 조비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與吳質書’) 한시 속 우정은 연애 감정과 닮아 있다. 서글픈 것은 우정 역시 일방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