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어떤 사람들에게 전복은 고통의 근원이었다. 전복 잡는 일은 힘들었고, 수탈당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버텨내기 버거웠지만 피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가서 전복을 잡았다.
“위태롭구나, 전복 따는 여인이여. 바다에 나가 맨몸으로 들어가네. 저 괴로운 생애 가련해서, 어진 사람은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네.” 제주목사 이예연은 전복 따는 해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차마 전복을 먹을 수 없음을 시로 표현했다. 세종 때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기건은 전복 따는 노고를 본 후로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정조는 “전복 캐는 수고로움을 생각해 보니 어찌 전복 먹을 생각이 나겠는가”라고 했다. 많은 위정자들이 전복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백성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폭압적인 전복 공납은 이어졌다. 말린 전복은 왕의 하사품, 사례품 등으로 이용된 중요한 공물이었기에 철저히 관리했다.
김상헌은 남사록(南사錄)에서 “진상하는 전복 수량이 매우 많고 관리들이 공을 빙자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몇 곱이 되므로 전복 잡는 포작인들은 견디지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여 열에 두셋만 남게 됐다”고 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상소문에 실상이 잘 나타나 있다.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해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해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란 목자(牧者)보다 10배나 됩니다. (중략)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박물관에 근무하며 전시실과 수장고에 보관된 전복 껍데기를 마주할 때면 전복 공납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 유물 촬영하다가 전복 껍데기가 유난히 크다는 것을 느꼈다. 유심히 봤더니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북방전복(참전복)이 아니라 제주도 연해에 서식하는 둥근전복과 말전복이었다. 제주 바다는 큰 전복이 자생하는 축복받은 곳이지만 잡아서 바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둥근전복과 말전복은 북방전복보다 깊은 곳에 서식하므로 더 힘들게 잠수해서 잡았을 것이다. 어렵게 잡은 전복을 그들은 먹지 못했고, 도망갔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