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허난성 안양시에서 발견된 조조의 무덤 모습. 도굴이 한참 진행된 후에야 발견한 이 무덤은 손상이 심각했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최근 중국 허난성에서 삼국지 주인공 중 하나인 조조의 무덤이 발견돼 큰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조조는 살아생전 수많은 도굴을 해 악명 높았는데, 그의 무덤 역시 여러 차례 도굴된 초라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조조의 무덤을 통해 수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도굴의 역사와 의의를 살펴보자.》
9000년 전 도굴의 흔적
인간이 무덤을 만든 이래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는 꾸준히 있었다. 심지어 9000년 전 신석기시대 차탈회위크(¤atalh¨oy¨uk) 유적에서도 과거 사람들의 무덤을 의도적으로 파낸 흔적이 보일 정도였다. 유라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무덤을 경쟁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일정한 집이 없이 유목하는 기마 민족들은 정복할 성이나 도시가 없기 때문에 요즘으로 말하면 ‘현충원’과 같은 역할을 했던 조상들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 무덤 속 보물은 함께 전쟁에 참가한 부하 장수들에게 나눠주는 전쟁의 ‘성과급’ 역할도 했다.
‘조조의 활약’ 이래로 중국에서 도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암시장에서는 갓 도굴한 듯한 새로운 물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내몽골 훙산(紅山)문화에서는 발굴단에 참여한 연구원이 국보급 옥기를 도굴해 판매하다 검거된 적도 있다.
도굴로 발견된 조조의 무덤
위무왕(魏武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비. 위나라의 무왕은 조조가 맞지만 역사 기록에 그를 ‘위무왕’이라 쓴 적은 없어서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사라지지 않는 진위 논란
조조의 무덤에서 나온 인골. 인골은 60대로 추정돼 당시 조조의 사망 시기와 유사하다. 사진 출처 허난성문물고고연구원 ‘조조고릉’ 보고서(2016년)
분명한 점은 조조도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다는 것이다. 도굴에 앞장서고 의심도 많았으니 당연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 봉분(무덤 위에 높게 쌓는 둔덕)을 쌓거나 주변에 나무를 심지 말고, 귀중품을 넣지 말며 수의도 평범하게 하라고 했다. 사치스럽게 무덤을 만들 경우 도굴의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조가 가짜 무덤을 사방에 두었다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돌았다. 남송 시대 책에도 조조가 가짜 무덤 72개를 만들어 수많은 도굴꾼이 그의 무덤을 찾아 헤맸지만 정작 진짜를 못 찾았다고 할 정도였다. 이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영민한 조조가 자기 무덤이 쉽게 도굴되지 못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조조 무덤의 진위 논란은 향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옥새와 같이 왕을 상징하는 뚜렷한 증거 없이 초라한 돌로 만든 꼬리표 몇 개만이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본인이 했던 것처럼 그의 무덤도 수없이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조조의 무덤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을 과연 조조는 기뻐할지 궁금할 뿐이다.
목숨 건 음침한 도박
어디 중국뿐인가. 일제강점기 한국 유물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조선 총독과 같은 관리, 장사꾼은 물론 유물을 지켜야 할 박물관장 등 너나 할 것 없이 유물을 도굴했으니, 우리도 도굴의 큰 피해를 입은 국가다. 영화에서 신나게 묘사되는 보물 탐험의 이야기는 알고 보면 우리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도굴은 끊이지 않을까. 부귀영화를 어떻게든 죽어서까지도 이어가려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그 근본적 원인이다. 어두컴컴한 무덤 속을 뒤져서라도 재화를 얻고자 하는 도굴꾼의 욕망 또한 크게 차이가 없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져온 도굴은 이렇게 엇갈리게 표현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뫼비우스의 띠가 아닐까. 참혹하게 도굴돼 논란이 되고 있는 조조의 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가 살아생전 쌓은 업적 못지않을 것 같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