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 당근마켓 공동대표는 직장을 3번 옮기며 2번의 창업에 성공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준 컴퓨터에 빠져 들며 자연스레 개발자의 꿈을 키웠다. 그는 스스로를 ‘소심한 개발자’라고 했지만, 주위에선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능력과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지역 기반 서비스를 밀어붙인 추진력이 남다르다”고 평가한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가입자 2100만 명, 월간이용자(MAU) 1500만 명. 주간이용자(WAU) 1000만 명.
이 정도면 가히 ‘국민 애플리케이션(앱)’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국 가구수(약 2336만 가구)를 감안하면 가족 중 한 명은 이 앱을 쓰는 셈이다. ‘1가구 1당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거래 상대를 확인하며 건네는 첫 인사 “당근이세요?”는 유행어가 됐다. 중고 거래에서 시작해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로 진화 중인 당근마켓 얘기다.
앱 다운로드 수가 많다고 그 서비스가 반드시 성공적인 건 아니다. 방문 빈도가 높고 체류 시간이 길어야 한다. 글로벌 데이터 조사기관 앱애니에 따르면 가입자 1명당 월 평균 64회 당근마켓에 들어와 2시간 2분 동안 머물렀다.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넥스트도어(25회, 51분)보다 이용자들과 더 깊은 친밀도를 유지했다는 의미다.
회의실, 휴게실, 복도 등 사무실 곳곳에 붙여 놓은 이름이 독특했다. 동네에서 봄직한 장소들이다. 지역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근마켓의 정체성을 옮겨 놓은 것. 동네 아저씨 같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김 대표에게 ‘지역’에 그렇게 집중하는 이유를 물었다.
“인터넷이 대중화 된 게 20년, 모바일은 10년쯤 됐지만 그동안 많은 서비스들이 먼 거리 연결만을 가치 있게 여겼던 것 같아요. 저희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내가 사는 동네가 궁금하고, 이웃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으니까요. 그런 연결에서 새로운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전 직장인 카카오에서 의기투합한 김용현 공동대표(왼쪽)와 김재현 공동대표. 관심사가 같아 창업까지 함께 했지만 두 사람의 성향은 많이 다르다. 성격유형을 알아보는 MBTI에 검사에서 김용현 대표는 ENFP, 김재현 대표는 ISTJ로 정반대다. 동아일보 DB
당근마켓의 아이디어는 김 대표와 김용현 공동대표가 함께 근무하던 카카오의 사내 중고거래 게시판에서 얻었다. 서비스 범위가 좁으니 거래가 편했고, 같은 직원들끼리 거래라 신뢰도 높았다. 가성비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직원들은 수시로 드나들었고, 체류 시간도 길었다. 이런 성공 비결을 당근마켓에 그대로 옮겼다.
사명으로 채택되진 않았지만 ‘완소비’는 당근마켓 경영 철학의 하나로 남았다. 당근마켓은 매달 자원 재사용으로 얻게 된 탄소저감 효과를 수치로 보여 준다. 지난해엔 당근 거래로 약 2777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효과를 냈다.
김 대표는 수시로 환경 동향이나 관련한 유튜브 콘텐츠를 찾아본다. 원래 물건을 버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다가 아파트 단지의 넘쳐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보면서 중고거래의 필요성을 더 실감했다. 그는 “최근 수도권의 쓰레기 매립지 문제가 심각하다고 들었다”며 “당근마켓이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희 빼곤 모두 직원 1000명 이상 기업이잖아요. 그런 기업들 사이에 낀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아직 개척이 덜 된 ‘로컬’이라는 시장에 많은 개발자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당근마켓은 최근 1789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수많은 스타트업 중 이직 희망 기업 상위권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김 대표는 “더 뛰어난 기업이 많다”며 “지금보다 더 잘해야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며 몸을 낮췄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여느 스타트업처럼 당근마켓도 새로운 시도, 직원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다만 그런 분위기가 성과로 이어지도록 판을 깔아주는 건 리더의 몫이다. 개발자 출신인 김 대표는 누구보다도 그 중요성을 잘 안다.
“어떤 프로젝트를 두고 어디선가 회의적인 반응이 나올 때면 ‘처음엔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얘길 많이 해요. 그 팀을 믿어보는 거죠. 당근마켓을 시작할 때도 ‘이게 되겠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토론하고 개선점을 찾으면서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당근마켓에선 연차나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수시로 팀을 꾸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데 주니어 직원, 심지어 인턴사원이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는 팀도 있다. 김 대표는 “PM은 전통적인 회사의 팀장, 리더와는 성격이 다르다. 팀이 잘 돌아가도록 업무를 조율하고 뭘 더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연공서열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연차가 적다고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당근마켓은 최근 월 20~30명씩 채용할 만큼 몸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직원 수는 올해 안에 3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초기 스타트업의 수평적 문화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규모다. 김 대표는 그럴수록 전 직원들의 소통을 강조한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문화의 날’은 모든 직원이 모여 조직 문화를 토론하는 시간이다. 구체적인 답을 찾기보단 회사의 리더십, 지켜야 할 가치 등을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다.
“규모가 커질수록 상위 직급자만 공유하는 정보가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도 꾸준히 타운홀 미팅을 해요. 각 팀들이 서로의 업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궁극적으로는 회사와 함께 구성원들도 성장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김 대표는 양대 IT기업인 네이버와 카카오를 모두 경험했다. 김 대표는 “네이버에서는 큰 회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카카오에선 수평적인 소통 문화를 배웠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전부터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어요. 회사 다니면서는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왜 올랐는지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만든 적도 있어요. 트위터가 처음 나왔을 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잘 안 됐죠.”
첫 창업(씽크리얼즈)은 성공적이었다.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모아 놓은 포켓스타일, 소셜커머스 검색 서비스 쿠폰모아 등이 연달아 히트했다.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낸 젊은 개발자들을 업계에서 가만둘 리 없었다. 씽크리얼즈는 창업 2년 만에 카카오에서 57억 원에 인수됐다. 재밌는 건 카카오가 곧 서비스를 양도했다는 사실. 결국 카카오는 김 대표를 포함한 개발자들의 가능성에 배팅한 셈이다.
당근마켓은 이용자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한다. 거래 금지 품목을 걸러내고, 사기 가능성이 높은 거래를 찾아낸다. 김 대표는 “예전에는 금지 게시물 노출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목표였다면 앞으로는 아예 노출조차 되지 않도록 기술력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천재 개발자’라는 수식어가 뒤따랐지만 늘 성공만 했던 건 아니다. 카카오에서 김용현 대표와 야심차게 준비했던 맛집 리뷰 서비스인 카카오 플레이스는 대실패였다.
“모든 프로젝트, 모든 스타트업이 성공할 순 없어요. 시행착오를 어떻게 경험과 실력으로 만드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홈런 치는 개발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고객이 뭘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이용자 간의 신뢰를 높인 요인 중 하나가 매너온도다. 36.5도로 시작해 거래 후기 등 상대의 평가에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언제나 답을 주는 건 이용자들이었어요. 매너온도도 상대방이 얼마나 믿을만한 거래자인지 알고 싶어 하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한거죠. 서비스 초기엔 이용자 반응에 따라 일주일에 서너 번씩 앱을 업데이트 한 적도 있어요.”
당근마켓은 중고거래 플랫폼을 넘어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를 지향한다. 기존 터줏대감인 맘카페가 가입 자격에 제한이 있는 폐쇄형 커뮤니티라면 당근마켓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커뮤니티라는 차별점을 가진다. 당근마켓 제공
중고거래로 시작했지만 당근마켓의 목표는 지역 밀착 커뮤니티 서비스다. 올 5월 선보인 ‘내근처’도 그 중 하나다. 이웃들이 직접 입력하고 추천한 맛집, 알바 구인 정보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동네생활’은 커뮤니티 서비스다. 특정 아이스크림을 파는 편의점을 궁금해 하면 몇 분 안에 “OO아파트 정문 옆 편의점에 있다”는 답이 올라온다. 같이 배드민턴을 칠 친구를 찾고, 붕어빵 파는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 “취업 준비하면서 생긴 우울증 때문에 갈 만한 병원을 찾는다”는 글엔 응원 글이 줄줄이 달린다. “병원 정보는 몰라도 네일이라도 해 주고 싶으니 연락달라”는 이웃도 있다.
김 대표는 “네이버 검색 서비스보단 내 지역 정보를 더 빨리 찾을 수 있고, 폐쇄형 커뮤니티인 맘카페보단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동네생활은 최근 MAU가 600만 명에 이를 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당근마켓은 최근 1789억 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했다. 시장에서 평가하는 기업 가치는 3조 원에 이른다. 유통 대기업들의 시가총액과 맞먹는 규모다. 2019년 영국에서 출시한 글로벌 버전 앱 캐롯(Karrot)을 시작으로 캐나다, 미국, 일본 등 4개국 72개 지역에 진출했다.
그동안 ‘국민 앱’이라고 불려 온 서비스들은 상당수가 거리 제약을 없앤 ‘비대면’ 기반이다. 카카오톡, 배달의민족, 쿠팡 등이 그렇다. 만나지 않고서도 대화하고 쇼핑하는, 오프라인의 일상을 온라인으로 옮긴 서비스다. 당근마켓은 이런 성공 문법을 바꿨다. 지역을 세분화하고, 이웃과의 연결을 강조했다.
“당근마켓 안에서는 세대간 장벽도 무너지는 걸 느낍니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 선물을 사 드리고 싶은데 어떤 옷이 좋을지 모르겠다. 골라 달라’는 글과 사진이 올라오면 중장년 이용자들이 ‘이 나이엔 이런 걸 좋아한다’고 답을 해줘요.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이용하는 거의 유일한 커뮤니티 아닐까요.”
당근마켓의 목표는 전 세계 이용자 20억 명이 쓰는 글로벌 서비스다. 가입자수 2000만 명을 넘겼으니 목표의 1%를 이룬 셈이다. 가야할 길이 멀지만 김 대표는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옮길 생각이다.
“상장을 서두르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탄탄한 수익구조를 만드는 게 먼저겠죠. 우리의 속도대로 조금씩 앞을 바라보고 하는 게 사업인 것 같아요. 당근마켓이 이렇게 잘 될 줄도 만들 땐 몰랐으니까요.”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