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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만 들어도 고객의 미세한 감정 떨림이 보여요”

입력 | 2021-10-02 03:00:00

[박성민의 더블케어]시각장애인의 새 직업 ‘마음보듬사’
‘블라인드 마음보듬’ 상담의 세계
어둠속 익명으로 50분간 감정소통… 상대 의식 않고 목소리에만 집중
서울대 동아리서 창업후 7명 배출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공유 오피스에서 인터뷰 중인 ‘어린왕자’ 마음보듬사(왼쪽 사진 오른쪽). 대화방으로 들어가려면 시야를 가린 특수 안경을 써야 한다. 마음보듬사와 고객 모두 ‘어둠’이라는 동일한 조건에서 만나기 위해서다(작은 사진 위쪽). 7명의 마음보듬사가 남긴 메시지에는 주로 위로가 되는 글귀나 추천하는 책이 담겼다(작은 사진 아래).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공유 오피스. 바닥만 볼 수 있게 시야를 가린 특수 안경을 쓰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기자를 방으로 안내한 직원은 작은 호출기를 건넸다. 나가고 싶어지면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푹신한 의자와 나지막한 음악에 마음이 착 가라앉다가도 낯선 어둠에 이내 신경이 곤두섰다. 그 순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둠이 불편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는 자신을 ‘어린왕자’라고 소개했다. 이곳은 익명이 원칙이다. 기자도 ‘노트’라는 대화명을 정했다.

“어떤 고민 때문에 오셨나요.”

잠깐 체험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지만 종료 3분을 알리는 신호가 울릴 때까지 속엣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 녹취를 들어보니 50분의 대화 중 어린왕자의 목소리는 5분 남짓. 45분 동안 고민을 털어놓은 기자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안정과 여유를 찾는 것처럼 들렸다.

○ 어둠 속에서 327명의 마음을 보듬다

이날 기자가 이용한 서비스는 여느 상담과 다르다. 정확한 이름은 ‘블라인드 마음보듬’이다.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와 50분간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다. 철저한 익명으로 진행되고 끝날 때까지 상대방의 얼굴도, 방의 구조까지도 알 수 없다. 모든 걸 지우고 오직 대화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일반 심리상담이 진단이나 치유가 목적이라면 이곳은 경청과 공감이 중심이다. 활동 중인 마음보듬사는 7명. 보건복지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인증한 마음보듬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주체는 서울대 동아리 ‘봄 그늘’이다. 창업 동아리실에 모인 친구들은 누구에게나 ‘터놓고 말할 곳’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우울감에 시달리거나 고민이 있어도 병원에 가거나 심리상담 받기를 꺼려하는 친구가 많았다. 상담 기록이 남는 걸 원치 않았고 비용 부담도 진입 장벽이었다.

그러다 떠올린 게 ‘어둠’이다. 어둠 속에선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내 목소리에만 집중한다. 그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적임자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정서현 매니저(20)는 “시각장애인은 어둠 속에서 장시간 일하는 데 비장애인보다 적응이 쉽다”고 말했다.

2018년 5월부터 강남구 공유 오피스와 관악구 사무실 등 2곳에서 ‘봄 그늘’ 소속 학생들이 운영하기 시작한 마음보듬 서비스에는 지금까지 327명이 다녀갔다. 총 마음보듬 횟수는 679회. 평균 2회 이상 이용할 만큼 재방문 고객이 많다. 3년째 꾸준히 대화하러 오는 고객도 있다. 평점은 5점 만점에 4.82점을 기록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정 매니저는 “전문 상담을 받다가 마음보듬으로 옮겨 오신 분도 있다. 상담의 대체재 혹은 보완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잘 보인다

마음보듬을 받은 뒤 밝은 곳으로 나와 어린왕자 A 씨(54)와 마주 앉았다. 2018년 봄 그늘에 합류해 지금까지 약 200회의 마음보듬을 진행한 베테랑이다.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2008년 장애 판정을 받았다. 점차 시력이 나빠져 완전히 시각을 잃게 되는 질병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범위가 90도가 채 안 된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던 A 씨는 2003년부터 심리상담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에 욕심이 생겨 3년 뒤엔 대학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비장애인 석박사가 넘치는 심리상담 영역에서 상담사로 일할 기회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10년 넘게 공부한 게 물거품이 되나 싶었던 순간 마음모듬사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A 씨에게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지 못하면 대화가 더 어렵지는 않은지 물었다.

“청각에만 의존하면서 상대를 더 깊게 알게 돼요. 호흡이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에서 고객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져요. 들어와서 앉을 때 의자 소리에서도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드러나거든요.”

오전엔 병원 사무보조원으로, 오후엔 마음보듬사로 일하는 A 씨는 저녁엔 대학원까지 다닌다. 전공은 예술심리다. 음악 심리상담과 미술 심리상담 자격증도 있다. 시각을 잃어가는 중에도 색채 심리상담을 공부하는 이유를 A 씨는 “빛을 보는 순간까지는 색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직업의 한계를 넓히다

마음보듬이나 심리상담은 시각장애인에게 어울리는 직업이지만 기회는 제한적이다. A 씨는 “시각장애인 중에는 사회복지나 심리상담 자격증을 가진 분이 많다. 그런데 이들이 일할 기회는 충분치 않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5세 이상 시각장애인은 25만1565명. 이들의 고용률은 42.3%에 그쳤다. 전체 장애인 고용률 34.9%보다는 높지만 전체 고용률(60.2%)에는 한참 못 미친다.

마음보듬사가 의미 있는 것도 시각장애인의 직업적 한계를 넓혔다는 점이다.

B 씨(26·활동명 ‘좋은’)는 2017년 레버 시신경 위축증으로 중증 장애 판정을 받았다. 재활 과정의 동료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상담의 매력에 빠졌다. B 씨는 “장애 판정을 받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크게 좌절했다. 그때 마음보듬사를 알게 되면서 다시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는 고객들, 어둠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고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는 후기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릴 적 의료사고로 시각장애가 생긴 C 씨(38)는 헬스키퍼(안마사)와 마음보듬사를 병행하고 있다. 그는 “특수학교를 다니면 대부분 안마를 배우고 다른 직업을 선택할 기회는 거의 없다”며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직업 영역을 나눠 생각하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요정 할머니가 나타난 기분”

마음보듬 50분 이용료는 3만5000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대면 서비스에 제약이 생기면서 전화 상담(2만5000원)도 시작했다. 이 중 1만3000원이 마음보듬사 몫이다. 남은 수익은 거의 운영비로 쓰인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학생들이 프로젝트까지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다. 급여도 없다. 공간 대여료 외에 운영비는 격월로 진행되는 마음보듬사 교육에 쓴다. 전문기관에 상담 교육을 의뢰한다. 마음보듬을 시작하기 전 80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고 실습도 하지만 다양한 고객의 고민을 보듬으려면 역량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봄 그늘 멤버들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고객 후기를 볼 때다. 한 고객은 “동화 같았다. 언제나 내 편인 요정 할머니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정 매니저는 “학업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활동 기간 1년 동안 마음보듬사와 고객들께 배우는 게 더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A 씨에게 ‘어린왕자’라는 활동명을 정한 이유를 물었다.

“어린왕자가 낙천적이잖아요. 저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점점 시각을 잃어 전맹(全盲)이 될 때까지 저 역시 사막을 여행하고 있거든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날을 대비해 배우고 깨칠 것도 많고요.”

10월 15일은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 기본권을 생각하자는 의미로 제정된 ‘흰 지팡이의 날’이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