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영화 ‘밀러스 크로싱’
갱 영화는 정치에 대해 의미심장한 진실들을 일러주곤 한다. 갱 영화는 권력, 조직, 리더십, 세력 다툼 같은 정치의 중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코언 형제의 1990년 작 갱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정치 리더십에 관한 고전, 영화판 ‘군주론’이다.
1920년대 미국의 한 도시, 아일랜드계 갱과 이탈리아계 갱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계 보스 캐스퍼는 조직의 배신자 버니를 처단하려 하지만 아일랜드계 보스 레오가 방해한다. 버니는 다름 아닌 레오의 연인 버나의 남동생이기 때문이다. 캐스퍼는 레오의 방해가 부당하다며 반발하고, 레오의 오른팔 톰 역시 보스의 사사롭고 부당한 일처리에 실망한 듯 보스 곁을 떠나 캐스퍼 쪽으로 넘어간다. 일견 톰이 레오를 배신한 듯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레오의 승리를 도운 것으로 판명된다. 레오는 다름 아닌 톰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 조직을 재건하며 영화는 끝난다.
세 명의 리더를 비교해 보자. 첫째, 아일랜드계의 레오. 그는 갱 리더십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 무력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보아도 잘못한 버니를 자기 애인의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감싸고돈다. 아무리 힘이 세도 원칙이 없으면 상대의 진심 어린 복종을 불러올 수 없는 법. 정당화되지 않은 힘은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결국 이탈리아 갱이 반기를 들고, 도시의 평화는 깨지고 만다.
‘밀러스 크로싱’의 주인공 톰(게이브리얼 번·위 사진)은 모자로 상징되는 욕망을 좇지 않고 바라보는 인물이다. 아래는 르네 마그리트가 그의 작품 ‘필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 출처 IMDB·위키피디아
이처럼 톰은 얼핏 보기에 원칙 없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처신을 일삼는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러한 모호한 처신이야말로 결국 조직의 위기를 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톰이 상황의 내적 동학을 파악하는 명민한 안목과 판 전체를 읽는 너른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는 사람에게나 톰의 처신이 무원칙해 보일 뿐이다.
톰은 어떻게 해서 전체를 볼 수 있고, 상황의 내적 동학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해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톰은 어느 것에도 몰입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를 둘 수 있고, 모든 일에 거리를 두기에 전체를 볼 수 있다.
몰입하지 않는 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그는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모두 기뻐 날뛸 때 뒤로 물러나 그 장면을 찍어야 하는 촬영기사처럼, 그는 상황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는 어떤 상황에도 몰입하지 않기 때문에 몰입이 주는 쾌감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모든 야단법석에 함께하되 그 일부가 되지 않고, 늘 거리를 두면서 상황 전체를 생각한다. 게임에 참여하되 게임의 룰과 시작과 끝을 생각한다. 그는 행동하는 자라기보다는 생각하는 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내내 톰은 어떤 우울에 잠겨 있다.
코언 형제의 영화 ‘밀러스 크로싱’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숲속의 검은 모자. 모자는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사진 출처 IMDB
위대한 리더 톰은 모자를 쫓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필그림(The Pilgrim)’에서처럼, 그와 모자는 분리되어 있다. 모자라는 욕망을 좇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목전의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전체를 볼 수 있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선, 이것이야말로 리더의 핵심 자질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특정 욕망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고 대상과 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모자를 사랑하지만 모자를 쫓아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몰입의 쾌감 대신 아득한 피로와 슬픔이 있다. 그것이 전체를 생각하는 리더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