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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인사이트]비대면시대 전시풍경… “해외작품, 이젠 호송관 없이 모셔와요”

입력 | 2021-10-06 03:00:00

새 표준된 비대면 전시 준비



호송관 없이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에 도착한 중국 청동기 유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하기 위해 화물운송 상자를 옮기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기욱 문화부 기자


《지난달 12일 오후 6시 반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화물기에서 랩과 비닐로 3중 포장된 화물 운송상자가 내려졌다. 현장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하역 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오전 5시 반 도착 예정이던 화물은 태풍 여파로 13시간 늦게 도착했다. 이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린 화물은 불과 나흘 뒤 개최된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에 전시될 유물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기원전 10세기 말 서주(西周) 때 제작된 소극정(小克鼎·소극 글자가 새겨진 세발솥)이다. 현존하는 중국 서주 시기 소극정은 전 세계 7점뿐으로 희귀 유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에 전시된 ‘소극정’.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런데 팬데믹 여파로 중국 측 호송관 없이 이례적으로 유물만 국내로 들어왔다. 전시를 기획한 오세은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유물이 무사히 도착한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며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으로 유물 운송 여부를 확인했다. 유물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를 사진으로 찍어 중국 박물관에 보내줬다”고 말했다.


○ ‘줌 화상회의’ 통해 전시유물 선정

통상 해외 전시에서는 유물 대여기관이 2인 이상의 호송관을 보내 유물을 운송하는 게 원칙이다. 호송관은 운송과정 전반을 맡아 출발 전과 해외 도착 후 유물상태를 파악한다. 전시실 설치에도 참여해 유물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전시돼야 하는지를 조언한다. 전시가 끝나면 유물 파손여부를 확인한 후 이를 회수하는 업무도 그의 몫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입출국이 제한되면서 호송관을 해외로 파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해외유물 전시에서 비대면 협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박물관이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을 기획한 건 지난해 초. 이 무렵 국내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약 1년 동안 박물관은 휴관과 개관을 반복했다. 박물관은 1년여 동안 특별전 개최여부를 검토하다 확진자가 하루 500명 안팎으로 떨어진 올 6월에야 전시를 최종 결정했다. 문제는 중국 측 호송관 파견이었다. 중국 당국은 한중 박물관의 협조 요청에도 호송관의 출국을 불허했다. 결국 양국 박물관은 호송관 없이 유물을 옮기기로 했다.

올 4∼8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특별전에 앞서 한국과 영국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줌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들여온 ‘셰익스피어 초상화’를 설치하는 과정을 생중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박물관이 호송관 없는 해외 전시를 진행한 건 이뿐이 아니다. 올해 8월 끝난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특별전도 영국 런던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초상화 78점을 들여왔다. 이 중 셰익스피어 초상화는 실물을 보고 그린 유일한 초상화다. 이 전시를 기획 중이던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영국에서 하루 1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해 현지 방문이 막힌 상태였다. 이에 따라 양측은 전시준비를 줌(Zoom) 화상으로 진행했다.

한영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지난해 4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화상회의를 열어 전시 콘셉트를 정하고 작품을 선정했다. 또 영상중계 업체를 동원해 운송은 물론 작품 설치의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영국 측에 보여줬다. 호송관을 대신해 작품상태를 확인한 국내 보존과학자를 섭외하고 작품 설치 때마다 카메라와 스크린, 컴퓨터 등 영상 중계장비를 갖추느라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양수미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영상중계로 인해 작품을 한 시간에 1점밖에 설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이메일로 해외 개인 소장자들 접촉


팬데믹으로 해외 전시기관에서 작품 대여가 어려워지면서 국내 미술관이 개인 소장자들을 직접 접촉한 사례도 나왔다. 서울 강남구 마이아트뮤지엄은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소개돼 인기를 끈 유화 ‘황혼에 물든 날’의 작가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을 올 7월 개최했다. 이 전시는 작가가 소속된 갤러리가 팬데믹으로 파산한 데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해외 전시를 거부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미술관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을 소유한 미국 거주 개인 소장자들을 이메일과 전화로 접촉해 작품을 대여하기로 했다. 비대면 작업을 통해 개인 소장자들의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소장자가 집을 옮겨 전화가 연결되지 않거나, 고령의 소장자들은 이메일을 읽지 않았다. 미술관은 작품 분실 혹은 훼손에 대비한 보험 가입과 더불어 작품 보존을 위해 소장자가 제시하는 조건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 현지 미술품 보존업체를 동원해 소장자 자택에서 작품상태를 확인한 후 운반하기도 했다.

특히 대표작 ‘황혼에 물든 날’은 소장자가 이미 2005년 세상을 떠나 대여에 난항을 겪었다. 미술관은 미국 인명 사이트로 수소문해 소장자의 부인을 찾아 대여를 요청했다. 한국인 이민자였던 부인은 고국에서의 전시를 허락했다. 그 결과 전시된 80점 중 기관 대여 1점(미국 코넬대 미술관 소장품)을 제외한 79점을 작가와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입수할 수 있었다.


○ 해외전시 ‘비대면 준비’ 새 표준으로


팬데믹을 계기로 큐레이터 파견 없이 이뤄지는 해외전시는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일련의 전시에서 유물 파손 등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시 준비기간이 늘기는 했지만 호송관을 보내지 않고도 해외 유물을 들여오는 게 가능하다는 게 증명됐다. 오세은 학예연구사는 “호송관 없이 전시를 진행하다 보니 파손 위험이 있는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지 못하는 한계는 있었다”며 “그래도 전시를 준비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국내외 큐레이터들이 화상회의 등을 통해 협업하며 전시를 준비한 것도 성과다. 양수미 학예연구사는 “각국이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에서 카메라 너머로 상대국 큐레이터의 가족도 보며 생긴 끈끈함이 전시 준비에 도움이 됐다”며 “원격으로 전시가 가능하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미리 마이아트뮤지엄 큐레이터는 “개인 소장자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해 어느 정도 신뢰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해외기관에서 대여하는 전시에 비해 자유로운 전시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기욱 문화부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