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표준된 비대면 전시 준비
호송관 없이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에 도착한 중국 청동기 유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하기 위해 화물운송 상자를 옮기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기욱 문화부 기자
《지난달 12일 오후 6시 반 인천국제공항 화물청사.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화물기에서 랩과 비닐로 3중 포장된 화물 운송상자가 내려졌다. 현장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하역 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오전 5시 반 도착 예정이던 화물은 태풍 여파로 13시간 늦게 도착했다. 이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린 화물은 불과 나흘 뒤 개최된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에 전시될 유물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기원전 10세기 말 서주(西周) 때 제작된 소극정(小克鼎·소극 글자가 새겨진 세발솥)이다. 현존하는 중국 서주 시기 소극정은 전 세계 7점뿐으로 희귀 유물로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에 전시된 ‘소극정’.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줌 화상회의’ 통해 전시유물 선정
통상 해외 전시에서는 유물 대여기관이 2인 이상의 호송관을 보내 유물을 운송하는 게 원칙이다. 호송관은 운송과정 전반을 맡아 출발 전과 해외 도착 후 유물상태를 파악한다. 전시실 설치에도 참여해 유물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전시돼야 하는지를 조언한다. 전시가 끝나면 유물 파손여부를 확인한 후 이를 회수하는 업무도 그의 몫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입출국이 제한되면서 호송관을 해외로 파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해외유물 전시에서 비대면 협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올 4∼8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특별전에 앞서 한국과 영국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줌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들여온 ‘셰익스피어 초상화’를 설치하는 과정을 생중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영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지난해 4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화상회의를 열어 전시 콘셉트를 정하고 작품을 선정했다. 또 영상중계 업체를 동원해 운송은 물론 작품 설치의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영국 측에 보여줬다. 호송관을 대신해 작품상태를 확인한 국내 보존과학자를 섭외하고 작품 설치 때마다 카메라와 스크린, 컴퓨터 등 영상 중계장비를 갖추느라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양수미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영상중계로 인해 작품을 한 시간에 1점밖에 설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이메일로 해외 개인 소장자들 접촉
팬데믹으로 해외 전시기관에서 작품 대여가 어려워지면서 국내 미술관이 개인 소장자들을 직접 접촉한 사례도 나왔다. 서울 강남구 마이아트뮤지엄은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소개돼 인기를 끈 유화 ‘황혼에 물든 날’의 작가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을 올 7월 개최했다. 이 전시는 작가가 소속된 갤러리가 팬데믹으로 파산한 데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해외 전시를 거부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특히 대표작 ‘황혼에 물든 날’은 소장자가 이미 2005년 세상을 떠나 대여에 난항을 겪었다. 미술관은 미국 인명 사이트로 수소문해 소장자의 부인을 찾아 대여를 요청했다. 한국인 이민자였던 부인은 고국에서의 전시를 허락했다. 그 결과 전시된 80점 중 기관 대여 1점(미국 코넬대 미술관 소장품)을 제외한 79점을 작가와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입수할 수 있었다.
○ 해외전시 ‘비대면 준비’ 새 표준으로
팬데믹을 계기로 큐레이터 파견 없이 이뤄지는 해외전시는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일련의 전시에서 유물 파손 등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시 준비기간이 늘기는 했지만 호송관을 보내지 않고도 해외 유물을 들여오는 게 가능하다는 게 증명됐다. 오세은 학예연구사는 “호송관 없이 전시를 진행하다 보니 파손 위험이 있는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지 못하는 한계는 있었다”며 “그래도 전시를 준비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국내외 큐레이터들이 화상회의 등을 통해 협업하며 전시를 준비한 것도 성과다. 양수미 학예연구사는 “각국이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에서 카메라 너머로 상대국 큐레이터의 가족도 보며 생긴 끈끈함이 전시 준비에 도움이 됐다”며 “원격으로 전시가 가능하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미리 마이아트뮤지엄 큐레이터는 “개인 소장자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해 어느 정도 신뢰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해외기관에서 대여하는 전시에 비해 자유로운 전시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기욱 문화부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