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BTS)이 2019년 진행한 월드투어 콘서트 ‘Love Yourself: Speak Yourself’. 미국, 유럽, 아시아를 거친 이 월드투어는 해외 언론으로부터 “다감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라는 호평을 얻었다.
음악, 춤, 영상이 어우러진 이 월드투어에서 수많은 장면을 관객 눈앞에 찍어내듯 펼쳐낸 이는 ‘장면술사’로 불리는 유재헌 유잠스튜디오 대표(47)다. BTS에 앞서 서태지, 넬, 비, 싸이, 블랙핑크의 콘서트부터 평창올림픽 개회식서 화제가 된 ‘인면조 인형’ 쇼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공연, 전시, 콘서트 등 놀이판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 그가 이번에는 22일 개막하는 국립정동극장 신작 ‘소춘대유희_백년광대’에 무대·영상 아트디렉터로 참여한다. 유 대표는 4일 인터뷰에서 “관객이 그저 공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장면 속으로 스며든다는 개념으로 작업했다. 미디어아트 기술을 과하게 부각하지 않으면서 작품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만드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은 한국에서 일반 관객을 상대로 선보인 첫 근대 유료공연 ‘소춘대유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감형 콘텐츠다. 팬데믹으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원 앞에 100년 동안 공연장을 지키며 살아온 백년광대와 오방신(극장신)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공연이 펼쳐졌던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계승한 무대가 현재 국립정동극장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멀티프로젝션, 맵핑, 홀로그램, 딥페이크 등 기술로 실제 배우들의 무대와 100여 년 전 옛 광대의 놀음을 컴퓨터그래픽(CG)처럼 함께 구현한 게 특징이다.
여러 공연, 전시에서 대형 미디어아트를 선보인 그가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무대서 작품을 만든다. 그는 “규모가 줄어든 건 전혀 문제가 아니다. 개별 작품의 특징일 뿐”이라며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전통공연이야말로 현대적 표현방식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연은 호흡과 같다. 제가 만든 공간에서 관객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 에너지를 돌려받으면서 저 역시 유기적으로 호흡한다”고 설명했다.
집안에 음악가가 많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많이 듣는 동시에 순수미술도 접해온 그는 2000년 스튜디오를 차린 뒤 서태지, 싸이, 빅뱅, 2NE1, 아이유 등 여러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를 맡았다. 오페라, 무용극, 뮤지컬은 물론 김연아의 아이스쇼까지 놀이판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예전엔 제 일을 ‘세트 디자인’으로 불렀는데 ‘시닉(Scenic) 디자인’이란 말이 생겼어요. 관객은 시각, 후각, 청각을 구분해 장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 순간을 기억하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유 대표는 상품성보다는 경험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창작한다. 그는 “BTS 이후로 팬덤과 아티스트의 교감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BTS는 팬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팀인데 팬이 느끼고 경험하는 내용에 집중하도록 연출을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장르에서든 가상과 현실을 결합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건 익숙한 풍경이 됐다”고 덧붙였다.
온갖 장르를 섭렵한 그가 끝까지 고수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매뉴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해왔던 공식, 매뉴얼이 아닌 매번 새로운 시도가 필요해요. 제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사실 규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늘 모든 감각과 시야를 열고 고민할 뿐입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