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옛 왕조 전성기 함께한 도시 베이징 유목민족이 수도로 세운 곳 상하이 ‘중국 속 서양’이라 불려
중국 산시성 리산 남쪽에 있는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모습(위 사진)과 면적 72만 ㎡ 규모로 왕조 시기 20만 명이 15년에 걸쳐 완공한 자금성의 전경(가운데 사진). 개항 이후 급성장한 상하이의 모습(아래 사진). 동아일보DB
속담에 ‘중국의 역사를 100년 이해하려면 상하이에 가고, 1000년 이해하려면 베이징에 가고, 3000년 이해하려면 시안에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진시황릉으로 유명한 시안(장안), 현재 중국의 수도 베이징, 작은 어촌에서 거대도시로 성장한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 왕조의 흥망을 간직한 시안
중국사에서 통일왕조의 수도가 되었던 도시는 시안, 베이징, 뤄양, 난징, 카이펑, 안양(은의 도읍지), 항저우 등 7개 도시입니다. 이들 7개 도시 중 시안과 베이징이 가장 오랫동안 중국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두 도시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안과 베이징은 중국의 농경 지역을 통치하고, 유목민과 외교적으로 교류하기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
장안이 오랜 역사 속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당나라 시기입니다. 당의 장안성 건설은 수나라 문제(양견) 시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위를 따서 장안을 ‘대흥성’으로 바꿔 부르고 계획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대흥성의 북쪽에는 황궁, 그 남쪽에는 관청을 짓고 도시를 성벽으로 에워쌌습니다. 성벽 안에는 시장을 설치하고, 주작대로를 중심축으로 좌우가 완전히 대칭되도록 거리를 건설했습니다.
당나라는 국제적 문화를 지녔으며 장안성 역시 국제적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장안성에는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 사원이 공존했습니다. 둘째, 각국의 조공사절, 유학생, 상인 등이 모여들며 이국적인 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장안성의 도시 계획은 발해의 상경성, 일본의 헤이조쿄(교토), 경주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도인 장안성에서 당 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요.
○ 유목과 농경의 경계 베이징
베이징은 시안이나 상하이와 달리 주변에 큰 강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베이징이 유목민족에 의해 수도로 건설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시안은 접경 지역이었지만 한족에 의해 수도로 건설되기 시작한 사실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명나라 초기의 수도는 창장강(장강, 양쯔강) 유역의 난징이었으나 3대 황제 영락제는 수도를 다시 베이징으로 옮겼습니다. 영락제는 천도 이후 황제가 거주하는 자금성을 건설했고, 베이징 주변에는 다진 흙과 벽돌로 성벽을 쌓았습니다. 1436년에는 성벽을 보수하면서 네 모퉁이와 아홉 개의 문에 누각을 만들었으며, 자금성의 입구에는 천안문을 세우고 법령을 공포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17세기에는 여진족이 후금·청을 건국하고 명을 멸망시켰습니다. 청나라는 한족을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베이징을 수도로 삼고 자금성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9세기 들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습니다. 이후 마오쩌둥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다시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어촌에서 경제의 중심지 된 상하이
중국 창장강은 길이 6300k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입니다. 흔히 알려진 양쯔강은 창장강의 하류 지역을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창장강 유역에는 충칭, 우한, 난징, 상하이 등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이 중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급성장한 도시입니다.
상하이는 해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으면서 항구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는 아편전쟁 이후 청이 개항한 5개의 항구 중 하나였고, 이때부터 국제무대에 등장했습니다. 개항 이후 상하이에는 외국인 거류지인 조계가 설정됐습니다. 1845년 상하이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조계가 자리 잡았고, 조계의 면적은 처음엔 0.5km² 정도였습니다. 상하이 조계는 면적이 점점 확대되어 25km²에 이르렀고, 자치권이 대폭 확대되면서 ‘중국 속 서양’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19년에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각국의 대사관이 많아 서양 국가와의 외교에 유리했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비교적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중국 공산당 정부가 1980년대 말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며 상하이는 중국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개의 도시 중 어느 도시부터 방문하고 싶은지요. 분명한 것은 어느 도시나 나라를 방문하기 전 먼저 조사하고 공부해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이 체험이 되고, 체험을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