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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빗장 열어 당나라에 협력”… 고구려 비운의 역사 생생

입력 | 2021-10-12 03:00:00

한국학중앙硏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
고구려-백제-신라 등 유민 32점 분석… 평양성 전투 모국 침략 앞장 이타인
군사기밀 당나라 넘긴 고모 비롯해 보장왕 손자 등 문헌에 없는 인물들
부여지역 고구려 부흥운동도 기록




‘돌로 쌓은 성곽(평양성)을 지키는 자들로 하여금 적을 막는 빗장을 열도록 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를 막는 적이 없으니 곧바로 성을 함락했다.’

서기 668년 9월 고구려군과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전투에 참가한 이타인(李他仁·609∼675)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이의 신분과 행적을 석판에 새긴 글) 일부다. 그는 한때 고구려 장수로 동북 변방 12주와 말갈인을 통솔하는 책주도독(柵州都督) 겸 총병마(總兵馬)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마지막 정점인 평양성 전투 때에는 당나라 소속으로 모국 침공의 앞잡이가 돼 있었다.

당시 당나라 이세적(594∼669)과 신라 김인문(629∼694)이 이끈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외곽을 포위했다. 고구려 보장왕은 항복하려고 했지만,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남건은 최후 항전을 고수했다. 한 달여의 공방전 끝에 연남건의 책사인 승려 신성이 당과 내통해 성문을 연 직후 고구려는 멸망한다. 이때 이타인이 이세적의 지시를 받고 신성과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공으로 당의 종3품 관직인 우령군(右領軍) 장군에 오르게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타인을 비롯해 7세기 이후 당나라로 망명한 고구려·백제·신라·발해 유민들의 묘지명 32점을 분석한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를 최근 발간했다. 이 중 고구려 유민인 이타인과 고진(高震) 고모(高牟) 묘지명은 국내외 문헌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다. 저자 권덕영 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는 “사서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기록돼 후세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묘지명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높은 자료”라고 설명했다.

신간에 따르면 고모(640∼694)는 고구려 평양성에서 활동한 무장으로 멸망 전 당나라에 투항한다. 그의 묘지명에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 정성을 바치고 백낭(白囊·긴급한 문서를 담아 전달하는 자루)에 의지해 성심으로 (당에) 귀순했다’고 적혀 있다. 묘지명에 고모의 귀순 시기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평양성과 주변의 병력 배치 등을 담은 군사 기밀을 당에 넘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 조정은 그를 종3품 우표도위(右豹韜衛) 장군에 임명했다. 권 교수는 “이타인이나 고모 등은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했다”며 “묘지명은 거대 제국으로 도약하던 당나라가 이민족을 포용해 적재적소에 활용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구려 유민 고진(701∼773)은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다. 보장왕이 당나라에 투항한 후 그의 가문은 대대로 대장군 봉작과 식읍 1000호를 하사받았다. 고진은 당나라 동북 변방 요충지인 중국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서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공을 세웠다. 이에 당 조정은 그를 정3품 대장군인 금오위(金吾衛)대장군 안동도호(安東都護)에 임명했다.

이타인의 묘지명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부흥운동도 언급돼 있다. ‘고구려가 요사한 기운을 뻗쳐 공(公·이타인)은 조서를 받들어 부여지역으로 나아가 토벌했다’는 내용이 그것. 이는 당시 고구려 멸망 후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일대인 부여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권 교수는 “부여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국내는 물론 당나라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며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당나라 묘지명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