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정치의 최고 주인공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아닙니다. 주인공 자리는 애리조나 출신의 여성 상원의원 키어스틴 시너마(45)에게 양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관심의 초점이 됐으면 뉴욕타임스는 “시너마 천국”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습니다. 시너마 의원의 성 ‘Sinema’는 ‘시네마(Cinema)’와 철자 하나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하게 들립니다.
미국 정치권 최고의 화제 인물로 떠오른 애리조나 출신의 키어스틴 시너마 상원의원(가운데). ABC뉴스
시너마 의원이 가는 곳마다 시끄러운 시위대가 등장합니다. “드라마(시위)를 몰고 다닌다”고 해서 ‘시너마 드라마’라는 유행어도 있습니다. 2일 워싱턴 의회에 아픈 발을 치료하러 간다고 보고하고 애리조나 지역구에 내려온 시너마 의원. 피닉스의 고급 리조트에서 열리는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 참석하려고 하자 시위자들이 막아섰습니다. 시위대는 “치료 목적이라더니 왜 정치 행사에 참석하느냐” “대기업이 후원하는 행사에서 밥 먹으면 배가 부르냐” 등의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비즈니스 로비단체가 마련한 이 파티는 45분간 시너마 의원이 참석하는 대가로 참석자들이 최고 6000달러(약 700만원)씩 후원금을 내는 행사였습니다. 시너마 의원은 시위대를 뚫고 입장했고, 행사장 밖에서 시끄러운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3일 시너마 의원은 ‘화장실 봉변 사건’을 당했습니다. 자신이 19년 동안 정치 과목을 가르치는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수업 중 교실 밖에서 대기하던 시위대는 시너마 의원이 화장실에 가자 따라 들어갔습니다. 남성이 포함된 ‘애리조나 변화를 위한 연대(LUCHA)’라는 단체 회원들은 시너마 의원이 볼 일을 보는 동안 문 앞에서 미리 준비해온 항의문을 읽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민규제에 막혀 수십 년 동안 미국에 오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시너마 의원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동안에도 옆에서 계속 항의문을 읽었습니다. 시위대는 전 과정을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렸습니다. 이 동영상은 단숨에 500만 건의 조회 수를 돌파했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시너마 의원(오른쪽)과 문 앞에서 항의문을 읽는 시위대 회원(왼쪽). ‘애리조나 변화를 위한 연대(LUCHA)’ 트위터
5일 공항에 나타난 시너마 의원을 ‘그린뉴딜 네트워크(GNDN)’라는 단체 회원들이 둘러쌉니다. “왜 법안에 반대하느냐” “당신이 반대하는 것은 기후변화 예산이냐, 노인의료 예산이냐, 자녀보육 예산이냐” 등의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시위대를 피해 비행기에 탑승해 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이번에는 또 다른 시위자가 다가왔습니다. “시너마 의원, 방해하기 싫지만 지금 꼭 대답을 들어야 하겠어요. 당신은 ‘다카(불법이민자 추방유예 프로그램)’에 반대합니까?”
공항에서 “법안을 침몰시키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너마 의원을 뒤쫓아 오는 시위대. 뉴욕포스트
시너마 의원은 민주당이 당론으로 미는 사회복지 법안에 반대합니다. ‘넘버(법안 액수)’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시위대와 수시로 부딪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반대하는 것은 시너마 의원뿐만이 아닙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조 맨친 상원의원(74)도 있습니다. 이들 2명의 의원이 민주당 내 온건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흔히 ‘맨치너마(맨친+시너마)’라고 부릅니다.
맨친 의원도 시위대의 공격 대상입니다. 얼마 전 시위대가 맨친 의원의 배에 카약을 타고 접근해 “왜 법안에 반대하느냐. 이건 지출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다”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렸습니다. 독특하게도 맨친 의원은 워싱턴에 머무를 때 주택이 아니라 배에서 삽니다. 화장실이건, 카약이건 ‘맨치너마’에 대한 극성 시위대의 기발한 접근 방식에 미국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조 맨친 상원의원(가운데)이 타고 있는 배에 카약을 타고 접근해 해상 시위를 벌이는 시민단체 회원들
시너마-맨친 의원은 사회복지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국민들이 복지의존증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과도한 지출이 인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이유입니다.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아 “소신파” “원칙주의자”라는 칭찬도 듣고 있지만 뒤에는 복잡한 정치 셈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화당 텃세가 심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시너마 의원은 애리조나에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이 배출한 상원의원입니다. 웨스트버지니아 역시 맨친 의원을 제외한 주지사, 주 의회, 다른 한 명의 상원의원 등 주요 포스트를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정치 생명을 이어가려면 무조건 당론을 따르기보다 과도한 사회복지 지출에 반대하는 지역구 민심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맨친 의원은 노령인데다가 주지사를 지냈고, 10년 넘는 상원의원 경력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협상가능 선을 1조5000억 달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 민주당 강경파와 시위대의 표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습니다. 반면 시너마 의원은 초선인데다가 협상 선도 밝히지 않은 채 반대 의사만 표하고 있어 “공화당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당적을 초월해 협력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왼쪽)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오른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8년 매케인 의원 별세 때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 연설을 했다. 폴리티코
애리조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매버릭(maverick)”으로 불렸습니다. ‘개성파’ 정도로 해석되는 ‘매버릭’은 당론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민심의 흐름을 주도할 줄 아는 정치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들이 있죠. 매케인 전 의원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공화당 당론을 따르지 않고 민주당에 협력해 다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시너마 의원도 “내 롤 모델은 매케인”이라고 자주 말해왔습니다. 그녀가 ‘매버릭’이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전쟁터 같은 지금 미국 정치 상황에서는 무리인 듯합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