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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종석]‘더디지만 확실하게’… 독일의 과거사 반성

입력 | 2021-10-13 03:00:00

퇴임 앞두고 14개국 고별 투어 나선 메르켈 총리
재임 중 8번째 이스라엘 방문서 홀로코스트 또 사죄



이종석 국제부장


‘제2차 세계대전 후로 독일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국기를 흔든 건 2006년 독일 월드컵 때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출간된 한 책에 이런 취지의 설명이 나온다. 정말로 그랬을까 싶은데, 저자는 로이터통신과 BBC, 파이낸셜타임스 등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일하며 독일에서 30년가량을 지낸 싱가포르 태생 영국인이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 국가 독일이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유대인 집단 학살) 과거사를 반성하면서 줄곧 숨죽이고 살아왔다는 얘기를 강조하려 한 표현으로 짐작된다. 2006년이면 2차대전이 끝나고 60년도 더 지난 시간인데 그 사이 국민들이 길에서 국기 한번 흔든 일이 없기야 했겠나. 올해가 독일 건국 150주년이다. 작년은 독일 통일 30주년이었다. 2년 전인 201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되는 해였다. 뭐라도 했을 법한데 독일은 눈에 띌 만한 대규모 행사 없이 모두 차분하게 넘겼다. 저자는 독일의 이런 분위기를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최근 사흘간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16년간의 재임을 마치고 곧 퇴임하는 메르켈은 7월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모두 14개국 정상을 만나는 ‘고별 투어’를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을 빼놓지 않았다. 양국 간에 딱히 현안이 있어 이스라엘을 찾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메르켈 총리는 가는 곳마다 고개를 숙였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예루살렘의 야드바솀 박물관을 찾았고 이스라엘 총리와의 면담 자리에서도, 이 나라 장관들을 만났을 때도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퇴임을 앞둔 그가 독일 총리로서, 마지막까지 한 번 더 과거사를 사죄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이 재임 중 8번째 방문인데 이 중 6번을 야드바솀 박물관에 직접 들렀다고 한다.

첫 방문이던 2006년 메르켈은 박물관 방명록에 ‘과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고 썼다. 2년 뒤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이던 2008년엔 독일 총리 최초로 이스라엘 국회 연설에 나서 “독일은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짊어져 왔고 이런 책임은 독일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메르켈이 ‘유럽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메르켈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재임 기간 내내 앙숙처럼 지냈지만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해서만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직접 사죄했다.

메르켈이 이스라엘에 도착하던 8일, 독일에선 2차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100세 남성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수용소에서 경비 일만 했어도 학살과 무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보다 하루 전에도 같은 이유로 100세 남성이 법정에 섰고 일주일 전엔 수용소 사령관 비서로 일했던 96세 여성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2차대전 후 주요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종료된 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일은 나치 부역자에 대한 단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영국인 저자 책엔 ‘Why the Germans Do It Better(독일인이 더 나은 이유)’라는 제목이 달렸고 아래에 부제(副題)로 ‘성숙한 나라의 비결’이라 쓰여 있다. ‘더디지만 확실하게(Langsam aber sicher).’ 성숙한 나라 독일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방식이다. 메르켈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종석 국제부장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