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 “불공정 경쟁” 비판적 메시지 인간심리 적나라하게 드러내 지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
웹 예능 프로그램 ‘파이트 클럽’에서 7번 참가자가 2번 참가자와 격투를 벌여 승리한 장면. 대결에서 KO패 당한 참가자는 즉각 퇴소 조치된다. 유튜브 ‘코리안 좀비’ 화면 캡처
김기윤 문화부 기자
《UFC 정찬성 선수의 유튜브 채널 ‘코리안 좀비’와 카카오TV는 ‘파이트 클럽’ 시리즈를 함께 내보내고 있다. ‘배틀 로얄 실사판’을 표방하는 이 콘텐츠는 4일 1화를 업로드한 뒤 일주일 만에 두 채널을 합쳐 조회수 280만 회를 기록했다. 11일 공개된 2화는 공개 10시간 만에 100만 회를 넘겼다. 파이트 클럽은 14명의 참가자가 일주일 동안 합숙하며 총 1억 원을 걸고 일대일 격투를 통해 생존 경쟁을 벌이는 콘텐츠다. 승리한 자는 한 단계 위로 승급하거나 상대의 상금을 빼앗을 수 있다. 최고 등급에 오른 참가자가 다른 최고 등급의 참가자와 싸워 이길 경우 지금껏 모은 상금을 챙겨 파이트 클럽을 떠날 수 있다. 간단한 규칙과 혈투만이 존재하는 이 콘텐츠에 시청자들은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현실”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유튜브 콘텐츠 ‘머니게임’에서 생존을 위해 고뇌하는 참가자들. 유튜브 채널 ‘진용진’ 제공
① 공정한 규칙? 기계적 평등, 보상, 자발성으로 포장…사회에 던지는 비판적 메시지
생존 게임 콘텐츠들은 공통적으로 이 전제 조건을 갖는다. 참가자들 모두가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전해 듣고, 주최 측이 마련한 판에서 승리하면 달콤한 보상이 따른다. 목숨까지 한번 걸어볼 만큼.
채널A 예능 프로그램 ‘강철부대’에서 40kg 군장 산악행군 미션을 수행 중인 UDT 대원들. 채널A 제공
하지만 불합리, 불공정은 자발성에 의해 전부 정당화된다. 생존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는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다’는 룰에 동의했기 때문.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투표를 거쳐 과반수 의견을 따라 게임을 한 차례 중단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게임이 싫으면 스스로 포기하라”는 시청자의 반응도 많다. 실제 부상이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게임을 중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언제든 ‘싫으면 그만해도 된다’는 게임 특성상 모든 과정에는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포함돼 있고, 게임은 정당한 듯 보인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생존을 다룬 콘텐츠는 ‘룰은 공정하다’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 2030이 늘 공정을 외치듯 게임과 사회의 룰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② 극한 상황 속 적나라한 인간 심리 묘사
2009년 CJ ENM이 선보인 ‘슈퍼스타K’ 시리즈가 성공한 이후 한국 콘텐츠 업계는 10년 넘게 오디션에 골몰해왔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참가자를 ‘생존’ 아니면 ‘탈락(죽음)’이라는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는 프로그램이 현재 생존 코드의 콘텐츠다.
극한으로 내몰린 인간 군상은 천차만별이다. 위기를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인간 심리, 본성에 대한 묘사는 콘텐츠의 묘미로 꼽힌다. 선과 악을 명확히 가르기 힘든 입체적 캐릭터들은 몰입도를 높인다. 시청자들은 “승진 경쟁을 앞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우리 직장 상사들 같다”거나 “역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며 공감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최후의 3인을 연기한 배우 박해수, 이정재, 정호연. 넷플릭스 제공
파이트 클럽 참가자들은 약한 상대를 택해 쉽게 돈을 챙기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파이터가 약자만 골라 싸운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고심한다. 주로 팀 대결로 진행된 강철부대 안에서는 승부보다 뒤처진 팀원을 챙기는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동료를 거칠게 몰아세우며 “네가 계속 이러면 다 같이 망한다”며 나무라는 모습도 보였다.
③ 왜 이렇게까지? “바깥은 더 지옥”
‘오징어게임이 존재한다면 참가하겠습니까?’
근래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런 설문조사 글이 다수 올라왔다. 여러 설문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456분의 1 확률에 베팅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의견이 다수지만, ‘참가하고 싶다’고 응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드라마처럼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 놓여 있다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는 의견이다. 오징어게임 속 어떤 캐릭터와 내가 닮았는지 측정하는 ‘성격 테스트’ 콘텐츠까지 나왔다.
가상의 생존 게임이 시청자를 고민에 빠지게 할 만큼 몰입감이 높은 이유는 각 인물에게 현실적이면서도 충분한 서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과거 ‘배틀 로얄’ 등 데스 게임 부류의 콘텐츠에서 참가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게임을 하며 서로 죽이고 죽는 내용과도 차이가 있다.
생존 게임에 참여하는 주된 현실적 이유는 돈이다. 생존 위협, 빚, 도박, 주식 손실, 생활고 등 각자의 이유로 나락으로 몰린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한 방에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은 게임이 유일해 보인다. 강철부대, 파이트 클럽에서는 돈뿐만 아니라 명예와 자존감도 이들이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참가자들은 “상대를 눌러야 내가 산다”며 승리를 정당화한다.
고된 현실에 지친 시청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캐릭터의 서사에 열광하고 있다. 이들이 고난을 극복했을 때 카타르시스도 느낀다. 생존 게임 콘텐츠를 즐겨 본다는 자영업자 이한준 씨(34)는 “목숨을 건 게임을 하다 끝내 난관을 극복한 우승자를 보고 울컥했다”고 했다. 오징어게임을 시청한 직장인 이성민 씨(32)는 “현실을 매력적으로 그린 ‘계급 우화’ 같다”고 평했다.
결국 생존 게임 콘텐츠가 이토록 각광받는 건 처절한 경쟁에 처한 우리 현실을 빼다 박은 듯 치밀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영미 평론가는 “삶은 지옥이고 삐끗하면 다 죽는다.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조심 가는 우리의 모습이 콘텐츠에 녹아들었다”고 분석했다. 오징어게임 속 오일남의 대사는 이를 한마디로 여실히 보여 준다. “여기(현실)가 더 지옥이야.”
김기윤 문화부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