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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상처를 쓰다[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입력 | 2021-10-13 03:00:00


“시인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시인의 나라로 가야 한다.” 괴테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동아프리카 인도양에 위치한 잔지바르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은 탄자니아의 일부지만 잔지바르는 구르나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섬들로 이뤄진 별개의 국가였다. 1964년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다수이면서도 소외층인 흑인들은 아랍계 및 아시아계 아프리카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이었다. 아랍계 무슬림이었던 구르나가 영국으로 간 것은 그래서였다. 열여덟 살 때였다.

자전적인 소설이 아님에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낙원’에는 그 상처가 아른거린다. 어머니는 아들 유수프를 애지중지한다. 틈만 나면 안고 볼을 꼬집고 몸을 번쩍 들어 입맞춤한다. 아들은 어머니가 열두 살이 된 자기를 아이 취급하는 게 창피하다. 어머니는 그가 발버둥을 치며 놓아달라고 해야 놓아준다. 그게 끝이 아니다. 그녀는 달아나는 그의 엉덩이를 토닥거린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놓아줄 기미가 없다. 아무 말 없이 꼭 껴안고만 있다. 아들도 이상했는지 어머니 품에 그냥 안겨 있다.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아버지가 무슬림 상인한테 그를 판 것이다. 빚 때문에.

‘낙원’ 서두에 나오는 생이별은 소년의 것이지 작가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작가의 상처와 묘하게 겹친다. 잔지바르의 폭력적인 역사가 그를 부모와 모국으로부터 생이별하게 만들었으니 그렇다. 역사가 그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내몰았다. 그는 영국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애가 닳았다. 그러면서 모국어 스와힐리어가 아닌 영어로 자신의 상처, 동아프리카의 상처를 쓰기 시작했다. 상처가 그의 작품의 한복판에 있는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상처가 그를 깊은 작가로 만들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