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 매체에 등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듣고 있으면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과연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가를 분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껴 적어 봅니다.
말을 듣자니 가해자는 없고, 모두 희생자만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소위 희생자(이하 희생자)는 자신이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헌을 살펴보니 스스로 희생자의 임무를 맡는 행위는 21세기에, 특히 정치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희생자’라는 영어 단어 풀이를 보니 ‘희생자’라는 의미와 ‘병적인 추구자’라는 의미가 같이 들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희생자는 반드시 가해자가 있어야 하는 선명한 명칭입니다. 명칭에 일단 호소력과 설득력이 담겨 있습니다.
희생자 중 일부는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고통을 대의(大義)를, 올바른 큰 도리를 따르다가 생긴 결과로 설명합니다. 자신은 혜택 받지 못한 소수에 속했지만 거대한 악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피와 땀으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그러니 방관하지 말고 정의의 힘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을 매도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을 대중의 힘으로 물리쳐 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희생자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하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이점을 얻습니다. 희생자임을 주장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하겠다는 공적인 선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설령 책임질 일이 밝혀져도 용서받아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희생자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바를 사회가 채워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믿으며 권리를 주장합니다.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슬픔이나 우울이 아닌, 분노와 적개심을 강력한 심리적 도구로 활용합니다.
희생자 의식은 부정(否定)이라는 방어기제가 출발점입니다. 부정은 비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려 투사합니다. 부정이 지나치면 자아가 허약해집니다. 합리적,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기능을 줄여 급하게 적응하지만 건강한 방법이 아닙니다.
자아가 휘둘리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혼돈을 피하려고 ‘쪼개기(분할)’라는 방어기제를 도입해 세상을 선과 악,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자아 기능은 더 떨어집니다. 이런 식으로 부정, 투사, 분할이 모이면 ‘우기기 게임’이 작동합니다.
부정은 원초적이어서 자연스럽습니다. 누구나 불편한 것에서 멀어지거나 그것을 없애려고 합니다. 눈이 부시면 눈을 감고, 나쁜 냄새가 나면 머리를 돌립니다. 비난을 피하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너무 아니라고 하면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의심과 궁금증이 듭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미지와 사회적 관계를 지키려고 부정은 강화되고 되풀이됩니다. 지치면 분노가 표출됩니다. 부정과 분노의 에너지가 맺어지면 손상된 자아를 스스로 회복시키기가 힘듭니다.
부정하는 언급에는 근거가 있거나 사실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적 논리가 늘 들어갑니다. “근거가 있으니 저렇게 말하겠지!”라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단, 같은 일에 대해 하는 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비교하면 벗어납니다. 아주 불편하게 반응하는 질문, 대놓고 답변을 거부하는 질문을 살피면 그 사람 마음의 흐름이 보입니다.
일부가 사실이라고 해도 말 전체가 사실은 아닙니다. 부정 활용에 익숙하면 예민한 문제를 피하려고 관련성이 미약하거나 전혀 없는 다른 문제를 앞에 내세우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해서 곤경을 피하려는 짓은 지루할 정도로 흔합니다.
‘우기기 게임’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되풀이되는 부정, 투사, 분할은 사회적 해악입니다. 듣는 사람을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로 만드는 것이 제일 심각한 후유증입니다. 산만하고 두서없는 말에 담긴 부정의 뒤에 가끔은 부정(不正)이 숨어 웃음을 참고 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