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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흉터 대신 날개 남겨… 더 멀리 날기 위한 과정일 뿐”[박성민의 더블케어]

입력 | 2021-10-16 03:00:00

폭력피해 청소년들의 우울증 탈출기
아픔을 극복해낸 7인의 청년들, ‘우리의 상처는 솔직하다’ 책 내



12일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에서 최연우 멘탈헬스코리아 대표와 피어 스페셜리스트 우가은, 강지오 양(왼쪽부터)이 1년 6개월간 써 내려간 책의 출간을 축하하고 있다. 아픔을 치유하면서 꿈도 생겼다. 우 양은 “대학에서 작곡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 양은 간호사가 꿈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상처는 흉터 대신 ‘날개’를 남긴다.”

“벽이 있다면 억지로 넘으려 하지 말고, 눕혀서 다리로 만들자.”

여기 7명의 특별한 전문가가 있다. 긴 우울과 불안의 터널을 통과한 ‘아픔 경험 전문가(Peer Specialist)’다. 이들은 10대 혹은 갓 성인이 된 청년이다. 정신질환 인식 개선 및 동료지원가 양성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기관 ‘멘탈헬스코리아’에서 만났다. 학교 폭력과 따돌림, 이로 인한 자해와 자살 시도까지. 터놓기 쉽지 않은 상처와 치유 과정을 지난달 책(우리의 상처는 솔직하다·사진)으로 펴냈다. 저자들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들은 생존자다. 여러 통계를 종합하면 한국 10대 청소년의 3분의 1가량은 경도 이상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질병관리청의 2019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중고교생의 13.1%는 최근 1년간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고, 3%는 실행에 옮겼다. 지난해 10대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은 6.5명으로 전년보다 9.4% 급증했다. 12일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 사무실에서 우가은(16), 강지오(가명·17) 양을 만났다. 잿더미가 된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를 지켜낸 방법이 궁금했다.

○ 폭력, 차별, 강박… 벼랑 끝 아이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일찍 정신건강 위기를 겪는다. 강 양이 우울감을 처음 느낀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지적장애가 있는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괴롭힘이 시작됐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성적 비하가 담긴 언어폭력이었다. 어른들도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5학년 때 반 친구 2명에게 놀림과 구타를 당했지만 담임은 피해자에게 형식적인 사과를 받아낸 뒤 용서하라고만 했다. 괴롭힘은 계속됐다. 자해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네가 태어났으면 안 됐어.”

우 양은 여섯 살 무렵 친할머니에게 들은 이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할머니는 원했던 손자 대신 손녀가 태어난 게 마뜩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 양은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폭력을 겪으며 벼랑 끝까지 몰렸다. 괴롭힘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이어져 우 양을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가해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게 지옥 같았다.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유로 무너지기도 한다. 문강 양(18)이 그랬다. 문 양은 2019년 뇌종양으로 아버지를 여읜 아픔을 딛고 씩씩하게 학교를 다녔다. 겉만 멀쩡했을 뿐 안에선 서서히 균열이 생기는 걸 몰랐다. 어느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등교 시간이 다 돼 눈을 떴다. 그때부터 두 달간 등교도 거부하고 은둔 생활이 이어졌다. 문 양은 “아빠가 없으니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속 불이 ‘탁’ 하고 꺼져버렸다. 번아웃(burnout·소진)이 왔다”고 말했다.

○가면 속에서 더 곪아가는 상처들

‘내 편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아이들은 가면 뒤로 숨는다. 학업과 교우 관계 스트레스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자해를 했던 이성음 씨(20·여)는 “힘들다고 말하면 패배자로 보일 뿐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감정이 읽히는 게 싫어 슬픔이나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가면 속에서 상처는 더 곪는다. 장예진 씨(21·여)는 초등학교 시절 당한 따돌림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도 철저히 배제당하는 ‘유인도 표류기’였다”고 썼다. 잘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다는 아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못난 척 연기도 했다. 장 씨는 “광대 같은 내 모습이 경멸스러워 집에 오면 더 우울해지고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고 했다.

어른들의 미숙한 대처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중학교 진학 후 심리검사에서 자살위험군 진단을 받은 강 양은 상담 내용이 그대로 학교와 부모님에게 전달되는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부모 손에 이끌려 간 병원에서 만난 의사도 강 양의 마음을 보듬지 못했다. 의사는 자해 상처를 보고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덜 심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강 양은 “겉으로 드러난 상처보다 마음속 상처를 헤아려주는 어른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추락은 두렵지만 착륙은 두렵지 않다”

그래도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누군가 손을 잡아줬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나 있던 문 양에게 담임선생님은 “수정테이프로 지우거나 펜으로 긋고 다시 써도 괜찮다”는 말로 힘을 줬다. 문 양이 피어 스페셜리스트 활동을 하며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반드시 뜨겁게 타오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잔잔한 모닥불도, 작은 양초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불씨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강 양에겐 온라인에서 만난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40대 아저씨였는데 ‘누구나 아플 수 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결같이 내 편이 돼 줬어요. 알고 보니 그분도 힘들었던 순간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고, 받았던 위로를 나눠주고 싶었대요.”

저자들은 “바닥을 찍고 올라왔지만 언제든 다시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우 양은 그럴 때마다 “추락은 두렵지만 착륙은 두렵지 않다”는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의 말을 되새긴다. 우 양은 “비행 중 난기류를 만나 흔들릴 때도, 착륙할 때도 있지만 더 멀리 날기 위한 과도기일 뿐 실패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며 웃었다.

강 양은 글씨가 저절로 지워지는 ‘기화펜’으로 감정일기를 쓴다. 힘든 순간이나 감정도 글씨처럼 곧 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다소 안정된다. 강 양은 “가장 힘들 때 내 옆에 10m 높이의 벽이 있었다면 지금은 4m쯤 남은 것 같다. 그래도 벽은 언젠간 허물어진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아픔도 장점이 될 수 있다

지난해 교육부의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에서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된 학생은 2만682명. 검사 대상이 초등학교 1·4학년, 중고등학교 1학년 등으로 한정된 점을 고려하면 실제 정신건강이 우려되는 10대는 훨씬 많다.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실려온 10대는 2015년 2291명에서 2019년엔 2배 이상인 4598명으로 늘었다. 전 연령대 중 증가율이 가장 높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관계 단절을 겪거나 고립되는 청소년은 더 늘었다. 부모의 실직이나 수입 감소가 자녀들의 심리를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그래서 더 중요하다. 멘탈헬스코리아가 2018년부터 최근까지 양성한 피어 스페셜리스트는 약 130명. 지난해엔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요청으로 ‘청소년 자해 예방단’으로 활동했다. 장은하 멘탈헬스코리아 부대표는 “자해 횟수를 줄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목표를 못 이룬 아이들이 더 큰 자기혐오에 빠질 수 있다”며 “언젠가 끊을 수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피어 스페셜리스트는 아픔도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과정이다. 상처가 있는 아이들을 모집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애들이 사고 치면 어떡하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최연우 멘탈헬스코리아 대표는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정과 사회의 문제다. 피해자나 환자라는 낙인을 지우고 사회의 리더로 성장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