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실감나는 그림을 보다
한국 사람이라면 대개 신라 화가 솔거의 일화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너무 진짜 같아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같은 새들이 날아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화가 솔거보다는 머리를 벽에 쿵! 부딪힌 새를 생각한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파트에 입주하려고 달려갔는데, 아파트 벽화에 머리를 찧은 것 같달까. 벽에 부딪힌 새들이 비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蹭蹬而落)고 전하는데,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수치사(羞恥死)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일화는 서양에도 있다.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포도를 그리자, 새들이 진짜 포도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화가 제욱시스보다는 입맛만 다시고 돌아서는 새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실감나는 그림들이라도 모사를 넘어서야만 훌륭한 작품이 된다. 묘사력이 뛰어났던 얀 반 에이크의 벨기에 성 바프 대성당 제단화(왼쪽 사진). 중국 회화사에서 뛰어난 묘사력의 대표로 거론되는 서희의 설죽도.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핍진한 묘사력을 과시한 사례는 유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멸망 후 송나라가 다시 서기까지 기간인 오대(五代) 시기에 활동한 서희(徐熙·885∼995년?)의 설죽도(雪竹圖)를 보라. 정교한 화훼화(花卉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이의 작품답게 이 설죽도의 대나무는 실제 대나무처럼 생생하다. 실로 이 그림은 중국 회화사에서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서희는 이러한 그림을 과연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정교하게 그리기 위해, 아마도 실제 대나무를 계속 관찰하고 모사하지 않았을까.
11세기에 활동한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식(蘇軾)도 서희의 설죽도처럼 외부 대상의 모사에 치중한 그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좋은 그림이란 외부 세계를 복제한 그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 세계를 무시하고, 그저 자기 느낌대로 휘저은 그림이 훌륭하다는 것도 아니다. 소식에 따르면, 탄력 있는 마음을 가지고 외부 대상을 창의적으로 소화한 다음에 비로소 그린 그림이야말로 훌륭한 작품이다.
그런 그림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눈앞의 대나무를 계속 관찰해가며 모사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나무를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다. 창의적인 것과 제멋대로인 것은 다르므로. 마음속에 하나의 대나무가 생겨날 때까지 대나무를 살펴보고 탐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대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대나무 그림을 그리려면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를 완성해야 한다(墨竹必先得成竹於胸中).” 대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결국 외부에 있는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의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일단 마음속에 대나무가 자리 잡으면, 빨리 그릴 수 있다. 일일이 외부의 대나무와 대조할 필요가 없다. 중심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탄력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외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관점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노송도 이야기를 솔거의 관점에서도, 새의 관점에서도, 혹은 벽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식의 그림이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다. 대나무를 그린다고 해 놓고 시금치나 쑥갓을 그리지는 않는다. 노송도 이야기를 하기로 해 놓고 노회찬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소식의 대나무 작품으로 여겨졌던 ‘절지묵죽도두방’. 보스턴미술관 소장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