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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 지느니 차라리…”, 말과 행동이 달랐던 두산 선수단[이헌재의 B급 야구]

입력 | 2021-11-03 11:12:00


2일 키움과 두산의 2021 KBO리그 와일드카드 결정 2차전이 열리기 전 김태형 두산 감독의 경기 전 인터뷰에서는 예전과 다른 묘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뭔가 ‘내려놨다’고 해야 할까요. 전날 1차전 패배로 탈락 위기에 몰린 것에 대한 질문을 받자 김 감독은 “그래도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중간 계투 투수들이 실점을 해서 지긴 했지만 그 선수들이 정규시즌 막판에 정말 잘해 줬기에 여기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가을 승리가 익숙한 두산 선수단


평소의 김 감독은 ‘화이팅’ 넘치는 사령탑입니다. 최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3차례 우승을 이끌었던 김 감독의 말 치고는 다소 ‘약한’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규시즌 4위를 차지하며 7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두산의 상황은 예전 최강일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우선 외국인 원투펀치 로켓과 미란다가 부상으로 모두 전력에서 이탈했습니다. 불펜 투수진도 피로를 호소하고 있고, 주전 포수 박세혁의 몸 상태도 좋지 않습니다.

이 때문인지 선수단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농담처럼 “준플레이오프에 올라가서 LG에 완패를 당하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말도 오갔습니다.

‘뼈 있는 농담’이었습니다. 두산과 LG는 함께 서울 잠실구장을 쓰는 오랜 라이벌입니다. 다른 팀에 지는 것보다 상대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더구나 오랜 기간 LG를 압도해 왔던 두산 선수들로서는 ‘차포’를 떼고 맞붙어야 하는 LG와의 준플레이오프가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산 선수들의 말과 행동은 180도 달랐습니다. 막상 그라운드에 들어서자 두산 특유의 ‘가을 DNA’가 발현됐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어찌 보면 1회초였습니다. 22살의 신예 선발 김민규가 키움의 베테랑 선두타자 이용규와 8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볼넷을 허용한 것이지요. 만약 여기서 선취점을 내줬다면 두산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번 타자 김혜성의 잘 맞은 땅볼 타구가 4-6-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로 연결됩니다. 발 빠른 두 명의 타자 주자를 동시에 잡아내면서 두산은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곧 이은 1회말 양석환의 2타점 적시타로 승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3안타 4타점으로 맹활약한 두산 양석환


이후 두산 타선은 말 그대로 키움 마운드를 폭격했습니다. 홈런은 한 개도 나오지 않았지만 무려 20개의 안타를 몰아치며 16득점을 올렸습니다. 역대 와일드카드 결정전 최다 안타이자 최다 득점 기록입니다.

두산으로서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발 투수 최원준을 아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날 승부가 치열하게 전개됐으면 최원준도 등판했을 것이고, 그 경우엔 준플레이오프 진출했다 하더라도 선발 투수의 부재 속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타자들이 타격감을 최상으로 끌어 올린 채 준플레이오프 나가는 것은 덤이지요. 정수빈과 페르난데스, 양석환, 강승호, 박세혁 등 무려 5명의 타자가 이날 하루에만 3안타씩을 몰아쳤습니다.

2회말 우전 적시타 후 기뻐하는 두산 페르난데스


4일부터 시작되는 LG와의 준 플레이오프에서도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두산이 앞선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LG는 두 명의 외국인 투수 수아레즈와 켈리가 건재하지요.

하지만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기세’가 중요합니다. 일단 두산은 키움과의 와일드카드를 통해 좋은 기세를 탔습니다. 최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오른 경험도 무시할 수 없지요. 가을이 익숙한 두산 선수들의 ‘가을 DNA’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