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간된 ‘대항해시대의…’ 16세기 亞 노예매매 실태 다뤄 “日에 끌려온 조선인 상당수는 도공… 그들이 만든 도자기, 日근대화 근간”
“조선에서 모든 연령대의 수많은 남녀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나도 조선인 노예 5명을 겨우 12이스쿠두(포르투갈의 옛 화폐단위)에 살 수 있었다.”
1598년 일본 항구도시 나가사키에 머물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 일주기’ 중 일부다. 당시 유럽 상인들이 드나들던 나가사키에서는 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인, 중국인, 벵골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노예들이 거래됐다. 흑인 남자 노예가 100이스쿠두에 거래된 걸 감안하면 조선인 노예의 값이 현저히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인을 많이 끌고 와 노예시장에 공급이 넘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수는 약 1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일부 여성들은 유곽에 팔려가 외국 상인이나 뱃사람들을 상대했다. 이들을 따라 마카오, 인도 등을 떠돈 조선인 여성도 있었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중 상당수는 도공(陶工)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다도(茶道)가 인기를 끌면서 찻잔 등 다기(茶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조선 침략을 결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황금 다실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인 장인들을 데려올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일본 사가현 등에 자리 잡은 조선인 도공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히젠(肥前) 자기’를 꽃피웠다. 일본은 약 700만 개의 도자기를 서양에 수출하고 거둔 막대한 이윤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나설 수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일본인 상인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노예도 많았다. 한 일본인은 11세에 오이타현에서 납치돼 포르투갈 상인 루이 페레스에게 팔려 가스팔 페르난데스로 개명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유대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이단으로 잡아들였다. 이에 페르난데스는 주인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멕시코 등으로 도피하며 가사노동을 했다.
페레스는 마닐라에서 조선인 노예 가스팔 코레이아를 사들였다. 코레이아는 주인을 도와 뼛조각과 십자가를 섞어 위조한 순교자 유골을 팔았다. 나중에 그는 페레스가 가톨릭에서 신성시하는 성모상을 침대 아래 둔 사실을 증언해 이단 혐의로 체포되도록 했다. 저자는 “16세기 대항해시대 아시아인 노예 연구는 사료 부족으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후속 연구를 통해 역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