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권위지 워싱턴포스트(WP)가 8일(현지시간) 한국 영화에 대한 장문의 분석기사를 내놨다. 워싱턴포스트 기사 캡처. © News1
지난 주 파이낸셜타임스(FT)와 뉴욕타임스(NYT)가 한국 문화에 주목한 데 이어, 미국의 권위지 워싱턴포스트(WP)도 한국 대중 문화에 대한 장문의 분석기사를 써내 높아진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위상을 보였다.
8일(현지시간) WP는 한국 영화를 조명하는 8000자 가까운 분석기사(‘오징어게임’ 훨씬 전부터 약자를 주목한 한국 영화제작자들: Long before ‘Squid Game,’ South Korea filmmakers elevated the underdog)를 내놨다. 이 기사는 메가히트작이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오징어게임’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1987년 여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1987년 여름은 6월 항쟁이 있던 때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던 시기다. 당시 서울의 신생 영화제작자들은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받아 군부독재 26년 간 그들의 창의성에 재갈을 물린 정부 검열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이 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벌거벗고 가시덤불을 걷는 일”이라며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경멸, 경제적 빈곤, 정치적 소외를 참을 수 없고, 누가 우리를 대신해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이 시기 민주화 운동은 1990년대 자유화 시기에 등장한 감독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들이 탐구한 주제 역시 최근 히트작에 반영돼 있다. 빈곤층과 특권층의 계급 전쟁에 관한 ‘기생충’, 부정직한 생화학 회사에 의해 맞이한 좀비 대재앙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싸우는 ‘부산행’, 사람들을 좀비로 만드는 역병에 직면한 가상의 왕국 통치자들의 타락에 관한 ‘킹덤’ 등이 그 사례다.
캐나다 사이먼프레이저대학의 영화 전문가 진달용 교수는 영향력 있는 1990년대 감독 세대를 언급하며 “그들의 영화는 오늘날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영화의 전조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당시 사람들의 투쟁에 초점을 뒀는데, 이젠 킹덤과 오징어게임도 그때와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신생 한국 영화제작자들은 꾸준히 사회 문제를 다뤄온 한국 영화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평등과 권력 남용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올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신입생 송찬씨(18)는 “오징어게임의 성공은 우리 현실에 흥미롭고 의미 있는 소재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며 ”우리가 한국에서 매일 씨름하고 있는 문제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고 말했다.
군부독재 시절 한국 영화는 전면적인 검열법 하에서 반공 선전이나 가족 공동체, 국가 정체성 등을 긍정하는 한정된 주제만 다룰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검열법이 폐지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창의성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영화 ‘기생충’과 ‘옥자’를 만든 봉준호 감독과 영화 ‘설국열차’, ‘아가씨’를 만든 박찬욱 감독이 등장했다. 이들은 노동 운동, 남북 분단, 성별 문제, 계급 분열 등 군부 시절 금지됐던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땐 경제적 불평등, 파산, 빈곤 문제를 파고들었다.
실제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1970년 군사정권 시기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한 봉제 노동자 전태일을 조명해 노동운동을 그려냈다. 2000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폭력을 경험한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겪다가 1997년 금융 위기로 실직한 후 자살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창동 감독은 2002년 한 인터뷰에서 ”개인은 역사나 사회적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제 영화를 통해 젊은 세대가 사회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더불어 군사정권 하에선 제작이 불가능했던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대중화되기도 했다. 남한의 물질적 과잉과 북한의 빈곤을 대비시킨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시리’와 비무장지대 속 남북한 군인들의 우정을 그린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꽃을 피우던 한국 영화는 2000년대 들어 다시 위기를 맞는다. 급격히 오른 영화 제작비와 줄어든 민간 투자로 한국 영화제작자들이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정부에 의존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집권한 두 번의 보수 정권은 비판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영화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재판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수천 명의 인사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으로의 전환은 부족한 자금 문제를 해결해줬을뿐 아니라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한국 감독들이 주목해온 불평등, 경제적 불안 등의 문제가 점차 세계적으로도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전 세계 사람들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한국 영화에 깊게 동감할 수 있었다.
한국 문화를 연구한 카네기국제평화기금(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이정민 선임연구원은 ”한국 영화는 한 국가로서, 한 국민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며 ”이 한국식 스토리텔링은 마침내 전 세계 관객들을 깨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로의 전환은 또다른 의존을 낳아 야심찬 일부 영화제작자들에게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넷플릭스 콘텐츠 ‘오징어게임’이 자신의 영화가 얼마나 수익성이 있고 도발적이어야 하는지 자기검열하게 만드는 또다른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최근 독립영화 ‘햄스터 죽이기’로 데뷔한 임시연 감독은 1990년대 후반 감독으로 분류되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혼한 미혼모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을 그린 이창동 감독의 2007년 영화 ‘밀양’이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가 한국의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미묘한 사회적 시선을 잘 그려냈으나, 넷플릭스 시대에 인기를 끌 수 있을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임 씨는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내 영화가 그저 넷플릭스용이면 충분할까’라는 것”이라며 “밀양이 내게 큰 임팩트를 준 것처럼, 나도 관객의 아픔을 끌어내고 치유할 수 있도록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속삭이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FT와 NYT도 한국 문화가 어떻게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는가를 분석한 기사를 실었다. 이들 역시 한국 문화의 인기 요인 중 하나로 한국의 역동성을 꼽은 바 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