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회귀 PBL08007’, 2008년. 갤러리 현대 소장
송화선 신동아 기자
“우리는 시간과 그것이 만든 질서에 얽매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이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인지 안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제는 내가 시작과 끝을 믿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 여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드니 빌뇌브 감독 영화 ‘컨택트’의 첫 부분이다. 화자 루이스(에이미 애덤스 분)는 언어학자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외계 생명체와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며 조금씩 변화해가는 게 이 영화의 중심 내용이다.
영화 초반 루이스는 지구와 완전히 다른 ‘그들’의 언어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둥근 고리처럼 생긴 문자부터 큰 장벽이다. 한 개의 기호로 다양한 의사를 표현하는 그들 문장은 왼쪽에서 오른쪽 또는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시작’도 ‘끝’도 없다. 그저 빙빙 돌아갈 뿐이다.
영화 ‘컨택트’를 보다 김창열 화백(1929∼2021)을 떠올린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김 화백은 물방울 그림 연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순간 찬란히 반짝이지만 이내 또르르 굴러 사라져버리고 말 물방울을 평생에 걸쳐 캔버스에 담았다. 평론가들은 그 배경에 김 화백이 겪은 삶의 고난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광복 이후 남쪽에 정착했다. 청년 시절 이쾌대 화백(1913∼1965)에게 그림을 배웠다. 6·25전쟁 이후 이 이력은 김 화백의 발목을 잡았다. 이북 출신이자 월북 화가의 제자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에 시달렸다. 친구들이 전쟁 통에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도 화가를 괴롭혔다. 그는 한국을 등졌고, 1969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방인이긴 마찬가지였다. 김 화백은 고통스러운 과거, 알 수 없는 미래 대신 현재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물방울 작품이 탄생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그는 한자와 물방울이 어우러진 ‘회귀’ 시리즈를 발표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화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고향 마을에서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한자는 그에게 곧 평화롭던 유년기를 상징한다. 그 단단한 과거의 기억 위에 화가는 곧 스러질 물방울을 얹었다. 이내 사라질지 몰라도 지금의 찬란함만은 고스란히 남도록. 그래서 김창열의 물방울을 바라보며 피천득 시 ‘이 순간’을 읽는다.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중략)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