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망명 당시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김옥균(왼쪽사진 왼쪽). 오른쪽 그림은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가 1887년 2월 일본 잡지에 게재한 풍자만화 ‘낚시 놀이’.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모습을 담았다. 김옥균이 꿰뚫어본 당시 세계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아일보DB·위키미디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884년 겨울,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의 망명은 전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 신문들은 그를 ‘조선판 메이지유신’을 시도하다 실패한 비운의 혁명가로 묘사했다. 이후 일본은 정치적 곤경에 빠진 조선(한국) 정객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유길준, 이준용(이하응의 손자), 박영효(갑오개혁 시 재차 망명)에게 그랬고, 광복 후에도 김종필, 김대중 등 정계의 거물들이 일본으로 피신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게 된 것만으로도 퍽 다행이다.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가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기까지 10년간 일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日의 과격한 노선과 거리 두기
김옥균이 망명해 오자 흥분한 것은 일본의 재야 세력이었다. 정부의 조선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불평하던 이들은 김옥균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개혁을 시도하려 했고, 심지어는 군사행동을 구상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琴秉洞, ‘金玉均と日本’). 먼저 훗날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써서 한일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한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곧바로 김옥균을 만나 고베의 유명한 아리마 온천에서 교분을 나눴다. 다음으로는 아시아주의와 대륙 낭인들의 거두로 유명한 현양사(玄洋社)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다. 후일 그는 김옥균에 대해 “인격, 식견, 그 풍채와 언변 등으로 볼 때 희대의 호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중국의 손문, 황흥(黃興) 같은 사람도 걸물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각각 후계자도 있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쉽도다, 김옥균에게는 그것이 없구나!”라고 회고했다. 세 번째 그룹은 자유민권운동의 자유당 좌파세력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에 반대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다 실패하자, 조선 문제를 구실로 세력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김옥균은 거리 두기를 계속했다. 이들의 과격한 노선이 도움이 될까 우려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적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에는 김옥균이 일본인들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 정부의 이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 사건이 1885년 12월에 일어났다. 일명 ‘오사카 사건’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유당 좌파 그룹이 조선 침공을 실행에 옮기려다 발각된 것이다. 수모자인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는 김옥균과 접촉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하자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낭인 수십 명을 보내 조선 정부 요인을 살해하면 각지에서 독립당이 동조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황당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관공서나 부자들을 터는 강도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간신 제거하라고 고종에 직격탄
‘오사카 사건’에 조선 정부는 전율했다. 일본 정부에 김옥균 인도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망명객에 대한 국제적 관례를 내세워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장은규에 이어 지운영을 암살범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김옥균 측근들은 지운영의 정체를 간파하고 고종의 암살지령문까지 탈취해 김옥균에게 건네줬다. 한때나마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김옥균은 격노해 상소문을 올렸고, 이는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 김옥균의 배신감과 함께 당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니,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한국학문헌연구소 편 ‘김옥균전집’).
김옥균은 먼저 지운영이 갖고 있던 암살지령문이 정말 고종이 준 거냐고 따져 물으며, ‘경거(輕擧)’라고 힐난한다. 이어서 고종이 중용하는 민씨들 중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삶에 기여한 자가 과연 몇이나 있느냐며, 이런 간신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폐하는 망국의 군주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소문을 본 고종은 김옥균을 죽일 결심을 더 단단히 했을 것이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에 맞서 거문도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의 화살은 청국으로 향한다.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이라고 하면서도 “거문도를 회복하여 조선의 강역을 보전하지 못하니 앞으로 또 외국이 다른 항구를 빼앗는 일이 생기면 폐하는 어쩔 것이며 청국은 무슨 방법으로 이를 막을 것입니까”고 묻고는, 곧바로 “원세개 같은 어린 아이가 오로지 자기의 공을 탐하여 외람되게 폐하를 속이려고 하니 폐하는 부디 그 술책에 넘어가지 마소서… (청국이) 원세개와 같이 구상유취(口尙乳臭)하여 시세를 판단하지 못하는 자를 파견한 것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원세개를 규탄했다. 그의 항청(抗淸) 의식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일본 역시 갑신정변 이후로 조선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돌아서 있으니 이 역시 믿을 만하지 않다고도 했다.
해외에서 묻힌 정치개혁 구상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과 비석. 동아일보DB
오사카 사건 등 재야 세력들이 과격해지고, 조선 자객까지 일본에 드나들게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3국으로 보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의 오지로 쫓아낼 궁리를 했다. 일본 경찰은 우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 머물던 김옥균을 미쓰이 별장에 강제 억류했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과 시민들 사이에 동정여론이 커져가자 1886년 8월 일본 경찰은 김옥균의 격렬한 저항을 억누르고 납치하다시피 선박에 그를 태웠다. 외국에서 당한 유배였다. 유배지는 도쿄에서 무려 1000km나 떨어진 태평양의 고도(孤島) 오가사와라(小笠原)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