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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떠나자! 7000년 전 고래사냥의 비밀을 찾아서

입력 | 2021-11-13 03:00:00

[Travel 아트로드]울산 반구대 암각화 여행
고래사냥 전 과정 담은 인류 最古 기록
제사 지낸 반구대 계곡에 그림 남겨
댐 영향 국보가 물에 잠기는 수난



선사시대 예술품인 반구대 암각화에는 육지와 바다에 사는 동물 300여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그중에 고래가 52마리다. 아래 왼쪽부터 새끼를 업고 다니는 귀신고래, 양 갈래로 물을 뿜는 북방긴수염고래, 점프한 후 바다로 거꾸로 입수하는 혹등고래의 모습과 사냥한 고래를 해체하는 장면. 고래 사냥의 전 과정을 기록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각화이기도 하다. 백성욱 사진작가·울산암각화박물관 제공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울산은 고래의 도시다. 장생포항에서는 1986년까지 근대 포경이 이뤄졌다. 천연기념물 제126호 ‘귀신고래 회유해면’으로 지정된 울산 앞바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의 흔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로 올해 발견 50주년을 맞은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다.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발견됐던 반구대 암각화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올해 4월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가득한 반구대 계곡 전체가 명승지로 지정됐다. 김경진 울산암각화박물관장과 함께 국내 최초의 미술작품이자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이 타임캡슐처럼 담긴 울주 반구대 계곡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인류 최초의 고래사냥 유적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계곡은 커다란 S자를 그리는 감입곡류천(嵌入曲流川)이다. 거북의 형상인 반구대에는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반구(盤龜)’라는 그림에 그렸던 수직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어 엄숙할 정도로 자연 그대로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가는 시작점에 향유고래 모양으로 건축된 박물관이 서 있다. 영화 ‘모비딕’에서 나오는 네모난 머리를 가진 거대한 고래다. 이곳에서 암각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길을 나선다. 호젓한 계곡을 따라 대숲과 중생대 공룡발자국 화석지, 천연습지가 이어진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까지 2.3km의 ‘선사문화길’은 차분하게 걸으며 수천 년 전 사람들과 정신세계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길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간은 오후 4시. 해질녘에 낮게 뜬 햇살이 바위 절벽에 비치면 음각으로 새겨진 암각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암각화 사진 촬영을 위해 특별허가를 받고 강변까지 내려갔다. 높이 4m, 너비 8m의 바위를 캔버스 삼아 그려진 그림은 모두 300여 점. 이 중에 고래가 52마리나 그려져 있었다. 또 호랑이, 표범, 사슴, 여우, 늑대 등 각종 동물은 물론이고 배를 탄 선원, 춤을 추는 사람들까지 빼곡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마치 7000년 전의 세상이 파노라마 동영상처럼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스킨스쿠버를 했던 것은 아닐까? 고래, 거북, 물개, 상어, 각종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헤엄치는 모습은 바닷속에서 본 장면처럼 생생했다. 귀신고래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고 북방긴수염고래 3마리는 두 갈래로 물을 뿜고 있다. 배에 줄무늬가 선명한 혹등고래는 물 위에서 점프했다가 입수하는 특유의 ‘브리칭(breaching)’ 동작을 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고래사냥’의 전 과정이 표현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는 점이다. 고래의 등뼈 지느러미에 커다란 작살이 꽂혀 있고(사냥), 옆에는 고래를 찾기 위한 표시용 부구(浮具·가죽을 이용해 물에 뜨게 만든 기구)도 그려져 있다. 배 위에 탄 사람들이 고래를 끌고 가고(인양), 항구에 내려져 거꾸로 죽어 있는 고래의 배에 칼집을 내놓은 그림(해체)도 있다.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 부위별 해체 그림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형태로 이뤄진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비밀

올해 4월 명승지로 지정된 반구대 계곡의 절경.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과 함께 계곡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 준비 중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김경진 울산암각화박물관장과 함께 의문점을 풀어보았다.

―과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에 배를 만들고, 수십 t에 이르는 거대한 고래를 사냥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을까.

“반구대 암각화에 작살이 꽂힌 고래를 사람들이 배로 끌고 가는 장면은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2009년 인근의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고래 뼈가 발굴됐는데 사슴 앞다리 뼈를 갈아서 만든 작살이 꽂힌 채 발견됐습니다. 탄소연대측정을 해보니 5000∼6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 창녕 비봉리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배와 노가 나오면서 배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증명됐습니다.”

―암각화가 그려진 울주의 반구대 계곡은 동해까지 직선거리로 26km나 떨어져 있다. 왜 이렇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속 계곡에 고래, 호랑이, 사슴 그림을 그린 것인가.

“공룡 발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는 반구대 계곡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죠. 이곳에서 고래사냥을 가기 전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사냥에 성공하면 감사의 의미를 담은 제사를 지냈던 유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 계절에 따라 어떤 동물을 잡고, 어떻게 사냥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교육적 역할도 포함돼 있습니다.”

선사시대 그림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다. 다섯 가지 색깔의 광물을 조합해 화려한 색상을 만들어낸 암채화(巖彩畵)다. 동굴 내부에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지핀 흔적도 있고 붓과 팔레트까지 발견됐다. 반면 반구대 암각화는 바위에 면을 깎거나 쪼고 돌려파기를 해서 만든 작품이다.

“차돌을 깨서 만든 도구를 나무뿌리나 뼈로 만든 망치로 두들겨 완성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라스코 동굴벽화처럼 화려해야 예술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페인팅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처럼 바위를 파내 수많은 동물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은 훨씬 더 고급 기술이죠. 단순히 지나가다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영혼을 담아 그린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가 70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현장을 보니 알게 됐다. 암각화 윗부분에 불쑥 튀어나온 절벽이 처마처럼 비를 막아 주고 있고 왼쪽 바위도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 덕분에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암각화가 그려진 부분만 뽀송뽀송하다는 것. 인근의 천전리 각석도 바위가 15도가량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림에는 빗물이 닿지 않는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암각화를 그릴 바위를 신중하게 고른 지혜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수천 년 동안 물과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풍화 속에도 끄떡 없던 반구대 암각화가 최근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 1965년 대곡천 하류에 사연댐이 건설된 이후 연간 4∼8개월간 통째로 물에 잠기게 된 것. 암각화가 물속에서 얼었다 녹고, 여름철 녹조가 낀 물이 스며들면서 암각화 표면이 급속히 부식되고 있다. 50년 전 처음 발견될 당시의 탁본과 비교했을 때 100곳 이상이 떨어져나가 형체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반구대 암각화는 보존 대책이 없으면 최종 등재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김 관장은 “기록이란 문자만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 또한 당시의 생활상과 관습, 전통을 보여주는 훌륭한 기록”이라며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정신세계, 의식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인 선사 예술품을 인류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가볼 만한 곳

영남 알프스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에 있는 10만 평 규모의 간월재 억새 평원.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와 표범, 멧돼지, 사슴 같은 수많은 동물도 그려져 있다. 주변에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9개의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간월산 재약산 신불산 주변의 661만 m²(약 200만 평) 고원에는 대규모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특히 간월재 33만 m²(약 10만 평) 규모의 억새밭에는 은빛 파도에 파묻혀 가을 낭만을 누리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쏠린다. 울주군은 영남알프스 9봉 완등 인증자에게 기념품으로 은화(6만5000원 상당)를 주고 있어 전국에서 도전자들이 나서고 있다.





글·사진 울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