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공연 중인 배우 이순재
배우 이순재(87)는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정한 리더의 자세”라며 “리더는 칭찬이나 아첨에 넘어가지 말고, 아프더라도 정직한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막 1장
연극이 끝난 분장실. 거울 앞에서 한 노인이 분장을 지우고 있다. 무대를 호령하던 왕의 얼굴이 조금씩 백발의 평범한 노인으로 바뀌어 간다.(이 인터뷰는 배우 이순재가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는 형식을 차용했습니다.)거울: 천천히 지워주게. 조금 더 함께하고 싶으니.
거울: 이런… 꽤 섭섭하군. 그렇게 오래 함께했는데. 나는 무대 위의 자네라네. 65년 전 캡틴 닉스코터(지평선 너머)부터 윌리 로먼(세일즈맨의 죽음), 돈키호테, 야동 순재… 지금은 리어왕이구먼.
순재: 왜 이제서야 말을 건네는 건가.
거울: 지난 60여 년간 나는 자네의 결정을 따랐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지만 이제는 알고 싶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제 우리의 해도 저물어 가고 있지 않나. 왜 무대를 선택한 건가. 자네는 좋았겠지만 나는 무척 춥고 힘들었다네.
순재: (깊은 한숨을 쉬며) 그랬겠지. 아내가 애들 돌반지 팔아 만두가게를 연 적도 있으니까. 이대 무용과 나온 사람을 데려와서는…. 그때가 시작이었을까? 피란 시절 우연히 한 여고 예술제에서 본 그 연극.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가슴이 왜 그리 뛰던지. 그 길로 학교로 뛰어가 선생님을 붙잡고 연극 한 번 만들어 보자고 졸랐지. 그때 대전고에서 청강을 했는데 그분이 마침 ‘햄릿’을 가르쳐 주셨거든.
순재: 몰랐지. 선생님이 작품을 쓰고 내가 기획을 했는데, 정작 난 출연은 안 했어. 그 작품이 뭐더라…. 잘 생각이 안 나는구먼. 재미있는 친구가 끼어 있던 건 기억해. 김창준이라고. 혹시 아나?
※1993∼99년 미 연방하원의원을 한 김창준 씨(3선·공화당)다.
거울: 서울대 다닐 때는 해체된 연극부를 재건했지? 그렇게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구먼.
순재: 이 사람들이 연극에 몰두하다 보니 영수증 처리를 제대로 못해 학교에서 예산 남용으로 없앤 거야. 하루에 계란을 150개나 먹은 식으로 올렸으니….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내가 대표로 각서를 쓰고, 단과대별로 흩어진 연극부를 하나로 모아 공연을 했지. 동랑 유치진 선생의 ‘조국’이었어.
순재: 응?
거울: 아, 아닐세. 그런데 취미로 해도 되지 않았나. 직업으로는 좀….
순재: 처음 연극할 때는 한 10년 정도 거의 돈을 벌지 못했지. TV를 한 것도 먹고살기 위해서였으니까. 집안의 반대는 말도 못했고. 10여 년을 거의 쉬지도 못하고 드라마, 영화를 쉴 새 없이 찍고 간신히 25평짜리 집하나 마련했으니까.
거울: 요즘 애들이 들으면 화나네.
순재: 응? 이 분야가 묘한 마력이 있어. 한 번 물들면 못 헤어 나온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 길이 아니면 안 되겠는데.
거울: 직업 때문에 헤어진 사람도 있었지. 말이 나와서인데 자네와 달리 난 그녀가 참 마음에 들었다네. 집도 부자고.
순재: 그 사람은 내가 방송국에 다니는 것만 알고 배우인 줄은 몰랐지. 그런데 만난 지 몇 달 지나 TV에서 날 본 거야. 얼굴이 새파래져서 배우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생활에 절제가 없어 안 된다고 하더군. 일류가 되면 밥은 굶지 않을 거고, 우리는 아직 아니었지만 외국에서는 당당한 직업이라고 반박했지. 사생활은… 잘사는 사람도 많다고 했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아. 그 뒤로 연기든, 생활이든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를 악물었어. 그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 됐구먼.
2막 1장
거울 뒤로 보이는 ‘리어왕’ 포스터
거울: 그런데 자네 나 몰래 보약 먹나? 3시간 20분 공연을 월요일 하루 쉬고 어떻게 20일을 매일 하나? 토요일은 두 번하고. 나 죽겠네.
순재: 이거?
거울: 그건 박카스고. 체력은 둘째 치고 사람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나. 더군다나 코로나 시국인데 대역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자네는 걱정도 없나.
순재: 속으로야 많이 걱정했지. 내가 쓰러지면 끝이니까. 극단 망하는 거지. 그런데 내 이름을 단 공연인데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여줄 수는 없지 않나. 아직은 체력적으로도 감당할 수 있겠다 싶었고.
거울: 하긴 자네는 어머니 상중에도 공연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순재의 리어왕’이라고 이름 붙인 건 자네 생각인가?
※연극(Life in the Theatre) 공연 중이던 2008년 7월 30일 오전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보러오는 관객들과의 약속이라며 이날 두 차례의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순재: 내가 하자고 한 건 아니고 기획사에서 한 건데…. 겸손이 아니라 난 사실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그냥 ‘리어왕’이라고 하면 도망갈 구석이 있잖아? 그런데 내 이름을 떡 붙여놓으니까 모든 걸 내가 책임져야 할 입장이 된 거지. 다행히 잘 돼서 모두에게 고마워.
거울: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다른 이의 리어왕과 다른 점이 뭔가.
순재: 미안한데 사실 내가 다른 리어를 본 적이 별로 없어.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원전 그대로 3시간이 넘는 리어왕을 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단지 관객들에게 이 말은 하고 싶군. 셰익스피어의 진수는 줄거리가 아니라 대사에 있다고. 물론 처음 보는 관객들도 대사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배우들이 잘 전달해야 하는 게 맞지. 그런데 워낙 대사가 길고 어려운 말이 많다 보니 쉽지는 않아.
3막 4장
테이블 위에 놓인 소품용 왕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재거울: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뭘 말하고 싶었을까.
순재: 하하하.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는 거? 아주 실감나는 교훈이야. 죽을 때까지 갖고 있어야지 절대로 먼저 주면 안돼. 내가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는 게… 우리 어머니가 96세로 돌아가셨는데 만약 내가 일을 안 하고 내 아들들이 뒷바라지를 했다면 우리 어머니 입장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 다음에는… 흔히 이 부분을 많이 놓치는데, 통치자는 늘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배려해야 한다는 거지. 회사 사장이든, 자영업자든,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 마찬가지야.
거울: 리어는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백성의 어려움을 깨닫더군.
순재: (벌떡 일어나며 대사를 읊는다.) 너희, 집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여. 어디서든 이 잔인한 폭풍우를 견디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아, 머리 눕힐 집 한 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창문같이 숭숭 뚫린 누더기를 걸치고, 어떻게 이런 험한 날씨를 감당하려느냐. 오, 나는 이들에게 너무도 무관심했구나. 부자들아! 가난뱅이의 고통을 스스로 겪어봐라. 그리하여 넘치는 것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여라.
거울: 자네 갑자기 왜 흥분하나.
순재: 이 대사가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지. 나도 국회의원을 해봤지만 권력은 국민이 위임한 거라네. 그런데 위정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지. 지금도 비슷하지 않나? 리어가 외치는 ‘잔인한 폭풍우’는 포악한 권력이라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포악한 권력에 시달리고 억눌린 백성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리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직언하는 충신을 물리치고, 끔찍한 경솔함을 거듭한 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지만.
거울: 인간은 왜 늘 잃은 뒤에야 소중함을 알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비로소 진실의 눈이 떠질까.
순재: 그 양반들이 꼭 이 공연을 보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면 좋겠구먼. 대사 곳곳에 새겨 들을 말이 많은데.
거울: 그 양반들?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을 말하나. 이미 늦었네. 전 회, 전석 매진이라. 그건 그렇고, 자네 언제까지 연기를 할 건가. 자네 위로 송해 선생님밖에 없다네.
순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는 그날까지. 나는 아직도 지금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는 꿈을 꾼다네. 하하하. 미쳤다고?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건가?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공연을 마치는 곳은 병원이 아니라 무대 위가 돼야 하지 않겠나.
이진구 기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