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9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천안함 폭침도발의 국민적 공분이 채 가시지 않은 2010년 11월 23일, 백주대낮의 연평도를 불바다로 만든 북한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해병대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하고 무고한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전포고도 없는 적의 기습 도발에 맞서 해병대 장병들은 불붙은 철모를 쓰고 사력을 다해 응전했다. 휴전협정문을 불태워버린 것과 같은 야만적 도발을 감행한 지 11년이 됐지만 북한은 한마디 사과는 고사하고 대남비방과 핵무력 증강에 골몰하고 있다.
판문점과 평양, 싱가포르, 하노이에서 떠들썩하게 열렸던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쏟아낸 갖은 선언과 합의는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를 저지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올해 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술핵 개발 지시 이후 극초음속미사일과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북한의 대남 핵타격용 ‘비수’는 더 날카로워졌다.
북한과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김정은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떤 협정이나 합의도 휴지조각이 될 수 있는 대북관계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정부는 ‘종전선언 카드’를 흔들면서 임기 말까지 대북 구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종전선언을 비핵화 협상의 입구로 삼아서 남북 및 북-미 비핵화 대화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의도이겠지만 4개월 뒤 치러지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남북관계 개선에 조급해하는 기류가 역력하게 감지된다.
하지만 이 같은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낮고, 성과도 미미할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비핵화라는 본질을 외면한 채 ‘평화 지상주의’로 점철된 ‘왜그더도그(wag the dog·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 방식의 대북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에서 민족과 평화 운운하면서 약속한 비핵화가 ‘공수표’로 판명 난 것이 그 증거다.
뿐만 아니라 ‘묻지마식 종전선언’은 북한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9월 담화에서 종전선언의 선결조건으로 주한미군과 한반도에 전개된 미 전략자산의 철수를 콕 찍어 요구한 것에서 그 속내가 훤히 보인다. 종전선언을 주한미군의 철수 명분으로 삼아서 한미동맹을 흔들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북한 요구대로라면 유사시 한반도 작전지원과 전력제공을 하는 유엔군사령부도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종전선언과 유엔사는 별개라는 정부의 입장과 달리 북한은 최근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를 거듭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이 종전선언에 합의하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도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발상이다. 친정부 성향의 전문가들은 ‘평화 만들기(peace making)’의 과정으로 종전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북한의 핵포기가 빠진 어떤 선언이나 합의도 ‘모래성’으로 귀결될 것이 자명하다. 커티스 스캐퍼로티 전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달 한미동맹재단과 주한미군전우회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해 “종전선언을 하든 안 하든 (북한의) 위협은 그대로”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의 대북정책을 멈춰야 한다. 한미 양국이 일치된 목소리로 핵포기 결단만이 한반도 평화의 출발점이고, 어떤 도발도 단호히 대처할 것임을 북한에 명확히 주지시키는 것이 순리다. 주객이 전도된 대북정책을 고수해 북한의 눈치를 살피는 평화가 연출되고, 핵무력 고도화의 시간만 벌어주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