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앞두고 또 내분
최민정(왼쪽)이 2018년 2월 22일 강릉에서 열린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선에서 심석희(오른쪽)와 충돌해 넘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단순 ‘사고’인 줄 알았지만 심석희와 대표팀 C 코치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심석희가 고의로 충돌한 ‘사건’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동아일보DB
《‘제발 심석희에게 전화도 그만하고, 문자메시지도 그만 보내라고 해주세요.’
한국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최민정(23·성남시청)은 지난달 말 소속사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발단은 한 매체에서 심석희(24·서울시청)가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한국 대표팀 C 코치와 주고받은 인터넷 메신저 대화 내용을 공개한 것이었다. 이 보도 이후 심석희는 최민정에게 계속 사과하려 했지만 최민정은 그런 시도를 오히려 2차 폭력으로 받아들였다.
심석희가 C 코치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에는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내부에 존재하고 있던 불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특히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건 심석희가 당시 여자 1000m 결선에서 최민정을 고의로 탈락시켰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1000m 결선에서 심석희가 아웃코스에서 안으로 진입하던 과정에서 최민정과 충돌하면서 두 선수 모두 메달을 따지 못했다. 최민정은 이후 심석희와 대표팀에서 함께 뛸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면서 대한빙상경기연맹에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고 연맹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들어갔다.》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 선장 없이 내분만 있는 한국 쇼트트랙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금 3개, 은 1개, 동메달 2개 등으로 종합 순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선태 감독(45)은 현재 중국 대표팀 감독이 되어 있다. 김 감독은 2019년 중국 대표팀에 부임했고 러시아로 귀화했던 빅토르 안(안현수) 역시 지난해 중국 대표팀 기술코치가 됐다.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참가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지만 주니어 시절부터 ‘제2의 안현수’라고 평가받았던 임효준(25)도 중국으로 귀화하면서 린샤오쥔이 됐다. 중국은 이렇게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쇼트트랙 전현직 선수들로 ‘드림팀’을 구성한 상태다. 정작 한국 대표팀에는 감독이 없다. 연맹은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는 2021∼2022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은 물론이고 올림픽 본선 역시 감독 없이 치를 계획이다. 연맹은 지난달 “쇼트트랙 대표팀을 이끌 감독을 선발하려고 했지만 기준에 맞는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면서 “그 대신 대표팀 코치 가운데 가장 경력이 많은 이영석 코치(41)에게 선임코치 자리를 맡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쇼트트랙계에서는 “감독 선발 기준이 너무 엄격해 생긴 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 선발 기준이 엄격해진 이유는 ‘파벌’ 때문이다. 서로 상대편 인물이 감독에 앉는 걸 막으려고 기준을 높이고 높이다 보니 결국 이 기준을 통과하는 인물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쇼트트랙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언론에서는 ‘또 쇼트트랙’이라는 표현을 쓴다”면서 “이건 쇼트트랙 파벌에 여야도 선악도 없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2014 소치 겨울올림픽 때 한국이 처음으로 종목 순위 3위로 밀리자 ‘구원투수’로 영입한 인물이었다. 김 감독은 한국 대표팀을 맡기 전에는 중국 창춘(長春) 팀과 일본 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중국 쇼트트랙을 대표하는 저우양(30), 량원하오(29), 한톈위(25) 같은 선수를 키운 게 바로 김 감독이었다.
중국은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총 33개의 메달(금 10개, 은 15개, 동 11개)을 딴 강국이다. 메달 48개(금 24개, 은 13개, 동 11개)를 딴 한국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2002 솔트레이크시티, 2010 밴쿠버 대회 이후 세 번째 종목 1위를 노리고 있다. 평창에서 12년 만에 종목 1위를 되찾은 한국이 ‘선장’도 없이 내분에 휘말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시간 걸리더라도 ‘원팀’ 돼야 정상 궤도
스포츠 세계에서 ‘내분’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선의의 내부 경쟁’으로 발전하면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한다. ‘왕조’를 구축했다는 평을 듣는 많은 프로팀들도 물밑에서 선수끼리 심한 갈등을 빚은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경기를 치를 때는 ‘프로답게’ 자기 몫을 다했기에 팀은 잘나갈 수 있었다.쇼트트랙만큼이나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양궁 대표팀도 적지 않은 내분을 경험했다. 올림픽 양궁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낸 박성현(37)이 올해 1월 한국사회체육학회지에 기고한 논문 ‘한국 양궁 국가 대표팀의 응집력 요인 탐색’에 따르면 2004년 아테네 대회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때까지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양궁 선수들 사이에도 ‘응집력이 아주 나쁘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적이 있었다. ‘대표 선발전부터 서로 경계가 풀어지지 않았다’ ‘응집력 상승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개인전 금메달 생각에 팀 내 질투와 시기가 있었다’ 등등의 이유였다.
하지만 양궁 대표팀은 이런 갈등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았다. 또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 논문이 나오자 심리학 전문가 등을 동원해 선수단 응집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은 단체전 금메달부터 집중해 남녀, 혼성 등 3개 종목 우승을 휩쓴 뒤 개인전에서 조기 탈락한 선수들도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궁 대표 선발 과정에서 오로지 실력만을 따지는 철저한 공정성과 투명성을 통해 잡음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쇼트트랙에서는 모두가 ‘파벌 싸움의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다. 상대는 ‘파벌 싸움 가해자’가 된다. 이렇게 파벌 싸움을 중심으로 사태에 접근하는 건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빅토르 안이 2014 소치 올림픽에서 3관왕을 차지하자 대부분의 한국 언론에서는 ‘그가 파벌 싸움에 휘말려 러시아 국적을 얻었다’고 분석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대회가 끝난 뒤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일축했다. 오히려 한때 파벌의 수혜를 입은 선수였다.
중요한 것은 긴장과 갈등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한 빙상계 관계자는 “파벌이 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로의 단점도 채워가야 한다. ‘원팀’만이 살길이라는 기본을 되찾을 때 한국 쇼트트랙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