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정략결혼이 흔했습니다. 개인 간의 연애가 아닌 가문이나 나라의 특정 목적을 위해 맺어지다 보니,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이라 불리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원제(元帝)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입니다. 그녀는 한나라와 흉노의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와 정략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중에 호한야가 죽자 왕위를 이은 그의 정부인 아들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고 생을 마쳤습니다. 시인 동방규는 이국땅에서 왕소군이 느꼈을 슬픔과 외로움을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노래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사진)도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와 정략결혼했습니다. 프랑스 왕정과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화친정책의 일환입니다.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혼인한 그녀는 4년 뒤 왕비가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며 사교 수렵 미술 음악 등 귀족들과의 모임을 즐겼습니다. 그녀는 검소하고 내성적인 루이 16세와 달리 화려하고 외향적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793년 10월 16일 앙투아네트는 국고를 낭비한 죄, 오스트리아와 공모해 반혁명을 시도한 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페르센 백작은 181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 소설, 뮤지컬로 다루어지며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으로 혁명을 불러온 당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부당하게 폄하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팔찌 한 쌍이 746스위스프랑(약 97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1∼4캐럿짜리 다이아몬드 56개가 달린 이 팔찌는 그녀가 결혼한 지 6년째 되던 해에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혁명의 도도한 물결 앞에 구제도는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과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야깃거리로 남았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