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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경영’ 외친 신격호 “가나초콜릿에 쥐 털이? 전부 불 태워뿌라!”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입력 | 2021-11-21 09:00:00

탄생 100주년 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 ②
샤롯데가 조선청년 신격호의 꿈에 나타난 이유
롯데화장품 이어 롯데껌 가나초콜릿 ‘대박’ 터뜨려
야근 직원 쓰러져 사망하자 연립주택 한 동(棟) 등기문서 유족에 건네
하나미츠 어른에 6만 엔 빚 갚고 자녀까지 롯데에 취직, 정년까지 근무




《1921년 11월 3일 태어난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회장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이를 기념해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제목의 신격호 회고록(나남)을 최근 발간했다. 회고록에 나타난 신격호의 숨 가쁜 도전과 성공의 스토리는 시계추를 돌린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사업 초창기 청년 시절의 신격호 사진 롯데지주


패전한 일본 땅에선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 1945년 8월 28일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이 일본에 주둔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일본 정부를 총지휘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황폐화된 도시들도 하나하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시가 폐허더미가 되면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조선청년 격호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학교도, 사업도 원위치였다. 격호의 모든 투자금이 미군의 폭격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에서 운명의 여주인공인 샤롯데는 격호의 편이었다.

●꿈결에 나타난 여성의 정체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도쿄 시가지. 롯데지주


공장 야전 침대에 누운 격호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하얀 피부의 금발 여성이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격호가 만든 화장품이었다.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선잠을 자다가 일어난 격호는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책꽂이에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그려진 샤롯데의 얼굴이 격호에게 다가왔다. 그렇다, 꿈속 여성은 샤롯데였다.

자신도 모르게 ‘롯데!’라는 말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새벽 동이 트자마자 격호는 인쇄소로 달려가 ‘롯데’ 라벨을 주문했다. 화장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전쟁이 끝난 뒤 격호가 주목한 사업은 비누였다. 와세다고등학교 응용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격호는 군수용으로 쓰던 유지와 글리세린 등 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치오지의 남루한 창고에 가마솥을 걸었다. 원료를 끓여 비누를 만들자 순식간에 팔렸다. 여기다 좋은 향을 첨가하고 포장지에 멋진 그림을 넣자 가격을 3,4배로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격호의 첫 사업 성공이었다.

이듬 해 3월 와세다 고교를 졸업했다. 이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비누 공장을 도쿄 서부 오기쿠보에 있는 곳으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으로 절반이 파괴된 건물을 사들여 수리를 마쳤다.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비누, 크림, 포마드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신제품을 개발할 땐 와세다대학 공학도서관을 찾아가 유제품 생산 매뉴얼을 숙독하고 제조공법을 연구했다.

●하나미츠 어른의 빚을 갚다

1950년 일본 신주쿠에 신축한 롯데제과 공장. 롯데지주


‘롯데’ 라벨을 붙인 화장품은 대성공이었다. 작은 유리병에 담아 롯데 상표를 붙이고 고급스럽게 포장을 했다. 종업원 10여명이 원료 구입과 생산, 포장, 배송, 수금 등을 나눠 맡았다. 수입이 너무 많아 밤 새워 돈을 정리하기도 했다. 돈뭉치가 밀가루 포대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날이 잇따랐다.

당시 번듯한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월급이 200엔 남짓할 때 격호의 한달 수입은 4만 엔이나 됐다. 직장인 200여명이 벌 돈을 혼자서 벌어들인 셈이다. 거래 은행에서는 격호를 귀빈 대우했다. 예금이 20만 엔을 넘을 즈음 은행에서 6만 엔을 인출했다. 그리고 격호에게 투자금으로 6만 엔을 맡겼던 하나미츠 어른을 찾아갔다.

“어르신! 6만 엔을 돌려 드리려 왔습니다. 저를 믿고 투자해 주신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미츠 부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미츠 부부와 격호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격호를, 오직 성실과 근면, 그리고 정직하다는 것을 신뢰하고 맡긴 6만 엔은 미군의 폭격으로 한 순간에 공중의 재가 돼버렸다. 그런데 불과 2년도 안 돼 빚을 갚으러 온 조선 청년을 보고 하나미츠 어른은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본전 장사만 하신거지요. 이자는 못 받으셨으니 도쿄에 작은 집 한 채를 사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사시면서 롯데공장에도 놀러 오십시오.”

두 부부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조선청년 격호가 기를 쓰고 하나미츠 어른의 빚을 갚으려 한 것은 돈 거래를 넘어선 신의(信義)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에게 성실성 하나만 보고 거액의 돈을 맡긴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격호는 조선에서 ‘조센징’ ‘바카야로’라는 멸시를 받고 자랐다. 근거 없는 일본인들의 조선인 비하가 팽배했지만 한국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격호 자신이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미츠 어른은 격호가 마련한 도쿄 자택에서 여든이 넘도록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의 아들과 딸도 롯데에 입사해 정년퇴직 때까지 회사를 다녔다.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어른에게 격호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결초보은(結草報恩)한 것이다. 대를 이은 인연에는 격호의 따뜻한 마음과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하는 인생 철학이 연계돼 있었다.

●롯데껌으로 승승장구

버스를 이용한 롯데껌 홍보활동. 롯데지주


화장품 사업에 성공한 격호는 1947년 초 거래처 배달을 마치고 온 직원으로부터 미국산 껌을 하나 건네받는다. 난생처음 껌을 씹어 본 격호는 달콤하면서도 코끝을 톡 쏘는 향기에 홀딱 반하고 만다. 조악한 일본 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품질이었다.

‘롯데 브랜드로 고급 껌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1947년 4월 격호는 추잉껌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선 가내수공업 수준의 공장을 포함해 400여개 껌 공장이 난립해 있었다. 우선 제품을 어떻게 차별화할지를 생각했다. 공장에 직원들이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도록 했으며 손 씻기, 손톱깎기, 이발 등으로 청결하다는 이미지를 주도록 했다. 껌을 절단하고 포장하는 여직원들의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모자를 반드시 착용토록 했다. 여기다 약제사 1명을 고용해 생산라인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도록 했다. 공장 바닥은 티끌 하나 안 보이도록 깨끗이 청소했다.

공장을 방문한 과자대리점주들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우리 아이에게 줄 껌이라면 롯데 껌을 사야겠네!”

격호는 훗날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 유명한 CM송으로 “껌이라면 역시~ 롯데 껌!”이라는 가사를 당시 대리점주들의 탄성에서 착안해 만들었다. 화장품에 이어 오늘의 롯데그룹을 만든 롯데 껌은 이 때부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950년 3월 신주쿠 하쿠닌쵸 3-270번지에 롯데제과 공장을 신축하면서 신격호의 롯데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격호는 선진국의 고급 제품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하루에 껌을 20~30개씩 씹느라 턱이 아파 밤에 잠을 설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격호가 신동주와 신동빈을 낳은 다케모리 하츠코라는 여성과 만나 결혼한 것도 이 즈음 일이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가 출산 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한 격호는 홀아비 신세였다.

하츠코는 유지 원료 도매상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20대 초반 여성이었다.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하츠코의 차분한 성격과 잔잔한 미소에 격호가 호감을 갖게 된 것이다. 서른 나이에도 공장 한 구석에서 숙식을 하던 격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구애를 한다.

하츠코는 ‘마음이 맞고 사람만 좋으면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1950년 9월 30일 고이와에 있는 처가 동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야근 직원의 산재(産災)에 연립주택 한 동을 건네

신격호와 다케모리 하츠코의 젊은 시절. 롯데지주


롯데 브랜드가 히트를 치면서 주문이 폭주할 무렵 격호의 공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던 경리직원 한 명이 야근을 하다가 회사에서 쓰러진 것이다. 직원은 며칠 뒤 사망했다. 주문 폭주에 비명을 지르던 회사 분위기가 한 순간에 싸늘해졌다. 동료의 죽음에 직원들은 일손을 잡지 못한 채 안절부절 했다. 격호도 큰 충격을 받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그였기에 자신이 고용한 직원이 열심히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회사에서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순직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 했다. 돈만 바라보고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회사가 유족의 생계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겼다. 격호는 직원 장례가 끝난 뒤 고인의 부인을 회사로 정중하게 모셔 위로했다. 그리곤 등기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부군께서 롯데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는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을 키우셔야 하니 이 연립주택에 입주해 사시고 나머지 세대는 세를 놓아 생활비와 자녀 학비로 쓰십시오.”

격호가 건넨 문서는 다세대 연립주택 한 동(棟)의 등기문서였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이만큼 배려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한 순간에 가장을 잃었으니 회사를 원망할 마음이 컸을 텐데 부인은 울먹이면서 고마워했다. 그래도 격호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보상을 하더라도 단란한 가정을 깬 것을 돈으로 메울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싸늘했던 회사 분위기도 되살아났다. 격호에게 달려와 눈물을 글썽이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조선청년 신격호가 일본에서 성공한 비결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기업을 일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만약 당시 회사의 성장에 도취해 직원들의 아픔을 달래지 않았다면 롯데라는 기업은 어떤 평판을 받았을까. 기업이 영구 존속하려면 최고경영자가 직원을 존중하고 직원의 아픔을 가족처럼 달래는 것이 필요하다. 매출을 더 올리는 것보다 직원과 사회를 보듬는 것이 기업 경영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격호는 일찌감치 터득한 것이다.


●초콜릿에 묻은 가느다란 실 하나, 2억 엔 원료 불태우다

초콜릿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신격호. 롯데지주


화장품에서 시작해 껌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탄탄한 사업 수완을 보여준 격호는 마침내 초콜릿 사업에서도 승부수를 띄운다. 롯데 가나초콜릿을 선보이기 위해 격호는 스위스 출신의 초콜릿 전문가를 초빙했다.

“제품이 아니라 예술품을 만들어 주세요. 원가가 비싸더라도 품질이 최우선입니다.”

제품을 대하는 격호의 경영관이 이 한마디에 다 녹아 있었다.

롯데 가나초콜릿이 일본 열도를 휩쓸 당시인 1964년 말 롯데는 처음으로 대졸 신입사원공채를 모집했다. 선발된 공채 1기생에 한국 대학 졸업생 6명이 포함돼 있었다. 화공, 기계, 전기 전공 학생들로 뛰어난 에이스들이었다. 격호는 이들에게 첫 두 달은 카카오 콩이나 설탕 부대를 나르는 허드렛일을 시켰다. 현장의 밑바닥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신입사원을 뽑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장은 전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숨가쁘게 말했다. 공장으로 달려온 격호는 상황을 파악하곤 기가 막혔다. 간밤에 출고한 초콜릿에 대한 품질검사를 하다가 제품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현미경으로 찾은 작은 물체를 직접 확인해보니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었다.

“이기 머꼬?”

“잘 모르겠습니다. 단정할 순 없지만 창고에 쌓아둔 카카오 콩 부대에 쥐 한 마리가 들어가지 않았나 추정할 뿐입니다.”

“그라모 이기 쥐 털일 수도 있다는 말이가?”

격호는 아찔했다. 아니 등골이 오싹했다. 롯데 제품에서 쥐 털이 발견됐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바로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출고 전에 발견돼 다행이었다.

“전량 불 태워뿌라!”

10톤짜리 탱크 3개에 가득한 초콜릿 원료를 모두 없애라고 지시했다. 원료 값만 2억 엔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회사로선 엄청난 손실을 각오해야 했다. 이날 출고분 뿐 아니라 요 며칠 사이 만든 제품과 원료를 모두 불사를 것을 지시했다. 공장장과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격호가 줄기차게 외친 품질경영을 스스로 무너뜨릴 순 없었다. 품질에서만은 소비자가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격호의 신념이었다.


일본 우라와 초콜릿 공장. 롯데지주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