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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의 ‘사談진談’]찍고 싶지 않은 줄서기 사진

입력 | 2021-11-24 03:00:00

지난해 3월 서울 광진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정책자금 지원 신청을 하려는 시민들이 계단까지 길게 줄을 선 모습.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김재명 사진부 차장


신문에 게재되는 사진에는 대부분 사람이 들어간다. 정치면에서는 등장인물이 주인공이라면, 만개한 꽃밭이나 눈 내린 들판에서는 조연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사진기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보도사진은 풍경사진과 달리 단풍이 붉고, 샛노랗더라도 등산객이 없으면 소용없다. 그렇다 보니 색은 덜 예쁘지만 사람이 보이는 나무 아래서 찍을 수밖에 없다.

기자들에겐 사람들이 줄 서거나 붐비는 곳이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피사체가 많을수록 다양한 사진이 나올 수 있어서다. 대표적인 장사진으로는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승차권 예매를 위해 줄을 선 모습을 꼽을 수 있다.

표를 구하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밤을 새는 수고로움도 감수해야 했다. 오래전에는 명절이면 터미널뿐 아니라 서울 각 지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귀성 수단과 인터넷 등의 발달로 줄 서는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서울역 대합실 인파 사진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승차권 예매가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오랫동안 찍어왔던 현장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줄이 생겨났다. 지난해 국내로 유입된 코로나19는 빠른 전파력에 비해 백신이나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확산 방지에 마스크가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지자 마트와 약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스크가 입고되는 날이면 전날 밤부터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한 채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국내외 할 것 없이 말 그대로 ‘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제조회사는 코로나 초기 돈을 더 주는 외국에 마스크를 수출해 버려 정작 우리가 필요한 시기에는 제작 원료가 바닥나는 등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정부는 이런 혼란을 보고 나서야 수출을 금지하고, 구입 수량 제한과 요일제 판매 등 조치를 취했다.

또 다른 줄은 예측이 빗나가면서 생겨났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당국의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소상공인들의 생계가 더 어려워졌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저금리 긴급대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신청자가 몰렸다. 한 접수센터에서는 3층에서 시작한 줄이 계단을 따라 지하까지 내려갔다. 선착순으로 서류를 받다 보니 자정이 안 된 시각부터 차가운 바닥에 박스를 깔고 아침까지 기다리는 일이 반복됐다. 앞 사람에서 신청이 끝나는 바람에 다음 날 다시 찾은 시민도 있었다. 결국 번호표를 발급하고, 요일제와 인터넷 접수와 같은 대책이 시행된 뒤에야 안정됐다.

얼마 전에는 요소수로 인해 트럭들이 줄을 섰다. 중국의 수출 규정 변화로 수급에 문제가 생겨서다. 요소수 사용량이 많은 트럭 운전자들은 웃돈을 얹어서라도 요소수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들에게는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운전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이 요소수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실시간으로 품절된 곳과 파는 곳이 공유됐다. 겨우 찾은 판매점에는 수백 m의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고서야 정부는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군의 비축 물량을 풀고, 수입을 위해 군용기를 띄웠으며, 개인 구매량을 제한했다.

그동안 사진기자들은 명품 가게 앞에서 셔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오픈런’ 행렬과 아이돌이나 유명 브랜드의 ‘굿즈’를 사기 위해 줄 선 모습을 많이 찍었다. 그런 줄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최근에는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모습과 여행을 앞두고 설렘 가득한 공항 인파와 같은 또 다른 ‘줄 사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렌즈를 통해 전해지는 그들의 표정을 담을 때는 내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하지만 마스크를 사거나 대출을 신청하거나, 요소수를 넣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에게서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들은 정부의 미숙함이 낳은 피해자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마음이 불편한 취재 중 하나다.

사전에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했더라면 줄을 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했기에 시민들이 불안함과 초조한 마음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세심하지 못한 정책으로 국민들을 줄 세우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뉴얼과 시스템을 정교하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안 생겨도 될 ‘줄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은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김재명 사진부 차장 ba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