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TV 한국어 강좌 강사로 등장한 ‘오마이걸’ 멤버 아린이 직접 한국어 발음과 예문을 알려주고 있다. NHK 화면 캡처
지바·도쿄=김범석 특파원
《“가…와…사…키….” 23일 일본 도쿄 인근 지바현의 셰러턴그랜드 도쿄베이호텔을 찾았다. 도쿄 디즈니랜드 안에 있는 호텔로 유명한 이곳은 이달 한 달간 한국 문화 및 음식을 체험하는 여러 행사를 열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는 법을 알려주는 코너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직장인 가와사키 미노리 씨(25)는 한국어를 아는 호텔 직원 베라루가 히카루 씨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한글로 쓰고 있었다. 가와사키 씨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 속 한국어를 이해하고 싶어 최근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직접 쓴 이름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한국어 또한 한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끝나 한국으로 여행을 가면 자기소개 전체를 한국어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베라루가 씨 또한 4년 전 한국인 친구를 사귀며 한국어를 배웠고 이제 손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했다. 그 역시 “빨리 한국에 가서 내 한국어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며 웃었다.
“한류 열풍의 주역은 한국어”
최근 일본에서는 K팝, K드라마에 이어 한국어가 한류 열풍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는 평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도쿄 최대 한인 타운인 신오쿠보에는 방탄소년단(BTS), 트와이스 등 한국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이름이 새겨진 ‘한국어 명찰’이 잘 팔리고 있다.
일본 5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조톳큐(超特急·초특급)’는 9월 한국어 제목의 신곡 ‘같이 가자’를 발표했다. 가사의 상당 부분은 ‘내 손 잡고 돌고 돌아’ ‘자 이제 즐기자’ ‘좋은 느낌’ 등의 한국어로 쓰였다. 일본 유명 가수가 한국어 제목 및 한국어 가사로 노래를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노래는 한때 유명 음원차트 ‘라인 뮤직’의 주간 차트 1위에도 올랐다.
지난달 15일부터 방송 중인 공영방송 NHK의 금요 드라마 ‘군조료이키(群靑領域·군청영역)’에서도 한국어 대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연 배우 심은경이 ‘한국에서 온 음악인’이라는 설정임을 감안해도 그가 혼잣말을 하거나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 등에서 수시로 한국어 대사가 나오는 모습은 공영방송 드라마로는 파격적인 설정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NHK 라디오가 매달 발간하는 한국어 강좌의 12월호 교재에는 ‘안녕하세요’ ‘식사하셨나요’ 같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한국 20대 젊은이들이 쓰는 생생한 신조어가 여럿 등장했다. ‘지갑 털털, 탕진잼(소소한 물품을 사며 지갑을 탕진하는 재미를 누린다)’ ‘이거 완전 소장각(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 ‘최애(최고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사진카드 찾는 중’ 등이 대표적이다.
이 교재는 한국의 지방 문화 및 사투리를 소개하면서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박지민·26)도 등장시켰다. 지민의 고향이 부산이라는 점에 착안해 “머라카노? 박지민, 니 학교가? 개않나?”라는 연습용 회화를 선보인 것이다. 이 교재를 만든 출판사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딱딱한 비즈니스용 회화가 아니라 한국 젊은이가 실제 많이 쓰는 말, K팝 등을 사용했다. 한국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이라면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어 토론 프로그램도 성황
일본 도쿄 인근 지바의 셰러턴그랜드 도쿄베이호텔은 1일부터 이달 말까지 한국 문화 체험 행사를 열고 있다. 이 중 일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는 ‘한글 이름 쓰기’ 코너에 특히 많은 사람이 몰렸다. 지바=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한 참가자가 먼저 올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속 가족에 대한 연구 및 분석 결과를 15분간 발표했다. 이후 다른 참가자 또한 ‘한국 드라마에서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례가 많은 것 같다’ ‘한국도 일본처럼 가족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로 바뀌는 것 같다’ 등의 의견을 나눴다.
일부 참가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했다.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제’, ‘행복추구권’ 같은 어려운 단어가 일본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한국어를 알고부터 한국 드라마와 한국 가요 등도 이전보다 더 좋아하게 됐다”며 “한류의 또 다른 묘미”라고 강조했다.
특히 참가자 요시오카 가오리 씨(50)는 한국어를 배우고 나서 양국 갈등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정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이산’에 빠져 한국어와 한국 역사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공부 전에는 일제강점기 위안부 역사를 잘 몰랐지만 이제는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요시오카 씨는 “한국어를 배우면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다”며 “이런 일본인이 많아져야 양국 갈등의 해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유춘미 씨(56) 또한 “단순히 한국어를 공부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어를 연구 및 분석하거나 역사 등 다른 분야로도 관심의 저변을 넓히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양국 연예인도 가세
NHK에서 매주 방영되는 TV 한국어 강좌에도 한국 걸그룹 ‘오마이걸’, 남성 아이돌그룹 ‘스트레이키즈’ ‘에이틴즈’ 등의 멤버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 한국어 단어 및 표현을 알려주고 있다. 지난달 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오마이걸 멤버들은 ‘길다’ ‘짧다’ ‘많다’ 등의 형용사를 자신의 손과 머리카락을 이용해 설명했다.
콧대 높은 일본 관가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외무성 관계자는 “과거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교관을 찾기 어려웠는데 최근에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직원들이 늘고 있다.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지바·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