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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코드’… “제사와 권력을 독점한 왕족 상징”[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입력 | 2021-11-26 03:00:00

1921년 9월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총 금관(위 왼쪽 사진). 사슴뿔과 나무를 모티브로 하고 곡옥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주목을 받았다. 이 금관은 20세기 초까지 만주족이 제사를 올릴 때 샤먼이 썼던 관(위 오른쪽 사진)과 서기 1세기에 흑해 연안의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활동한 유목민인 사르마트족의 관(아래)과도 유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강인욱 교수 제공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인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지난 100년간 신라 금관 6건이 발굴됐고, 가야와 마한 일대에서도 다양한 금동관이 발견돼 명실공히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자리매김했다. 신라 금관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물이 된 배경은 유물 자체의 찬란함뿐 아니라 유라시아와 신라 문화의 연결성,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참혹하게 유린된 슬픈 우리 문화재 역사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와 함께한, 하지만 여전히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금관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하늘과 땅 이어주는 사슴뿔 금관

1921년 처음 발굴된 신라 금관총 금관은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모티브로 하고 곡옥(曲玉)을 단 화려하고 독특한 형태로 인해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런데 신라 금관이 발견되기 4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금관이 흑해 연안의 호흘라치라는 고분에서 발견됐다. 이후 1978년에 아프가니스탄 틸리아-테페에서도 발견되었다. 이후 북반구 거의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이 관(冠)은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된다는 점도 밝혀졌다. 물론 샤먼의 관은 황금이 아니라 철이나 동으로 만들었지만 사슴과 나무를 모티브로 해 많이 닮았다. 바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대표물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관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유라시아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셈이다.

사슴의 뿔은 매년 자라는 것이니 그 자체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 하늘로 뻗은 아름드리나무는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케 했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하늘과 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쓰고 신성하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대표하는 제사를 모셨다. 샤먼의 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시베리아의 암각화 묘사에는 마치 와이파이 수신기처럼, 관을 쓰고 하늘과 소통하는 샤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유라시아 네트워크 상징하는 금관


화려한 황금 금관은 제사와 권력의 독점이라는 숨은 의미도 가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화려한 금관을 쓴 사람은 편두(扁頭)를 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금령총도 성인이 아니라 유아나 청소년이 썼던 것으로 생각한다. 편두는 갓 태어났을 때 하는 것이니, 바로 금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정해졌다는 뜻이다. 결국 하늘과 맞닿는 사람이 정해진다는 바로 제사와 권력이 독점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백화수피 자작나무제 관모. 자작나무는 신라에서 자라지 않고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대표적 북방계 나무다. 신라의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문화재청 제공

여기에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금관 안에 쓴 모자(관모)이다. 금 자체는 아주 무르고 변형이 쉽기 때문에 그냥 쓸 수 없고 가죽이나 옷에 붙여서 써야 한다. 황금으로 만든 신라 금관의 관모 안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섬세하게 가공한 별도의 모자도 함께 발견됐다. 자작나무는 신라에서는 자라지 않고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대표적인 북방계 나무다.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이 자작나무의 껍질로 그릇, 모자, 가방 같은 생필품을 만든다. 하지만 신라 주변에서는 이런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그 원료는 북방지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다. 천마총의 말다래(장니)도 자작나무 껍질을 복잡하게 가공해서 만들었다. 심지어 그 위에 복잡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자작나무 공예술이 발달했다. 당시 신라 왕족들은 금 공예술은 물론 북방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자작나무를 공급받는 무역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라의 금관은 신라의 왕족들이 독점적으로 가졌던 제사 및 권력과 동시에 유라시아까지 이어진 네트워크를 뜻한다. 또 단순한 개인의 기호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권위를 과시하는 대표적인 유물이었으니, 당시 신라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품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라만의 일이 아니었다. 흉노가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한 직후인 약 2000년 전부터 유라시아 곳곳에서 비슷한 금관과 편두가 나왔다. 흑해 연안과 아프가니스탄의 금관이 그 증거다. 황금과 샤머니즘을 받아들인 동서양의 각 지역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금관을 재창조했다. 기독교의 십자가나 불교의 불상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종교가 확산되면서 각 지역에서 자기 입맛에 맞게 그 종교적인 이미지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고고학 위장한 日도굴꾼의 발굴


신라 금관의 또 다른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바로 일본의 문화재 침탈과 관련됐다. 이 화려한 금관은 사실 일제강점기 때 고고학자로 위장한 도굴꾼이 발굴한 것이다. 1921년 9월 24일에 경주의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일본인 순사가 목격하면서 이 거대한 발견이 시작됐다. 당시 문화재 정책이 전무했던 경주였고, 주택을 개축하면서 무덤이 파헤쳐져서 그 속의 유물이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을 보존하라는 총독부 지시도 무시한 채, 경주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일본인이 제대로 된 발굴 지침이나 도면 없이 발굴을 해버린 상태였다. 며칠 뒤에 현장에 도착한 총독부의 고고학자들도 모든 유물이 꺼내진 상태라 허탈해할 정도였다.

이 황당한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모로가 히데오라는 자칭 문화재 애호가였다. 그는 경북도 의원을 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힘이 있었지만 사실 유물을 도굴하고 판매하는 자였다. 결국 일본 경찰이 1933년 그의 집을 수색해 도굴한 유물을 압수했다. 하지만 총독부와 일본 고고학자들은 그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연이어 제출하고 비호했다. 그의 행적은 유야무야 마무리됐고 모로가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모로가뿐이 아니었다. 한국의 고분에 황금 유물이 묻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의 도굴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한국을 실습장 삼아 사방을 파헤쳤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금관총은 물론 수많은 한국의 유물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금관총의 유물도 상당수가 지금 일본의 도쿄박물관과 교토대에 흩어져서 보관돼 있다. 이렇듯 우리 고대사의 새 장을 연 금관총의 발견의 뒤에는 가슴 아픈 식민지 역사가 숨어 있다.

한국인이라면 수십 번은 보았을 신라 금관. 그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비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 유물을 다시 조사해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냈다. 금관총 금동제 칼 손잡이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을 발견한 게 대표적인 예다. 서양에 ‘다빈치 코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금관의 코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가장 외진 동남쪽에서 유라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신라의 모습은 식민지 아픔을 딛고 하루가 다르게 세계로 뻗어 나가는 21세기 한국의 모습과 닮았다. 1500년 전 유라시아 각국과 맞닿으며 세계와 조응하고자 했던 신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신라 금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