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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다 경쟁 필요한 기후변화 시대의 전력산업[동아광장/이지홍]

입력 | 2021-12-03 03:00:00

경제-안정-친환경성의 전력시스템 구축
기후변화 시대 돌파 위한 인류의 난제
시장원리 반영한 전기요금 체계 동반해야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기후변화 시대를 돌파하려면 경제성, 안정성, 친환경성 3박자를 겸비한 전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인류가 풀어야만 하는 난제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전력대란은 시민들의 불편과 부담을 최소화하며 탄소 감축 목표를 달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날씨에 관한 한 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영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고 수준의 풍력발전 입지를 가진 나라다. 재생에너지에 꽂힌 유럽에서도 일등이라고 한다. 2020년엔 총발전량의 25% 가까이를 풍력으로 조달하며 야심 차게 탄소중립 어젠다를 밀어붙이던 영국에서 바람이 갑자기 멈췄다. 올 9월 풍력발전 비중은 7%로 급감했고, 전기 도매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2024년 전면 폐기를 앞두고 은퇴한 석탄발전소가 현역 복귀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영국 외에도 독일 등 풍력 비중이 높은 여러 유럽 국가에서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이번 글로벌 전력난은 에너지 전환 과정에 대해 여러 시사점을 남겼다. 몇몇 발전원에 ‘몰빵’하는 전원믹스는 위험하고, 화석연료를 대체할 기술력에 도달하기까진 갈 길이 아직 멀다. 온갖 신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나 현실적 대안으로 뜨고 있는 건 또다시 원전이다. 원자력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발전’엔 적합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전히 석탄이나 가스 아궁이에 불 때는 방법만 한 게 없다.

지금 같은 에너지 과도기에 필요한 건 다양한 기술 발전(發展)을 촉진하고 흡수할 수 있는 ‘혁신 친화적’ 전력시장이다. 20세기 초에 자리 잡힌 기존 체제는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 주도의 중앙집권적 운영 방식을 채택했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보다 민첩하고 분산된 의사 결정과 시장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혁신은 단지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저장, 탄소 포집, 송·배전, 수요 관리 및 규제 체계 등 시스템 전방위에 걸쳐 중요하다. 신기술이 언제 어디서 등장할지도 알 수 없다.

혁신은 인센티브와 경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술은 모방이 가능하고 독점 기업은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실제 전력산업이 도약한 19세기 말 미국엔 한국전력공사 같은 독점적 대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혁명 시대에서 기업과 지역 사회는 각자 사정에 맞는 소규모 로컬 시스템을 선호했고, 그 이면엔 치열하게 경쟁하는 신생 전력 회사들이 있었다. 물론 가격도 통제되지 않았다. 에디슨과 테슬라 같은 불세출의 발명가들이 현대 전기문명의 근간을 이룬 특허들을 출원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한국 전력시장은 혁신을 유인할 인센티브와 경쟁이 매우 부족하다. 일단 전기라는 상품으로 돈을 버는 게 원천 차단돼 있다. 민간 참여도 어렵지만 정부가 사전 평가된 비용 보전을 통해 수익 자체를 제한하고 있다.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 역시 수익 규제의 일환이다. 이러한 정부 개입 방식은 당장 시장지배력 남용을 방지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으로 파이를 키우는 데는 불리하다. 수익을 낼 여지가 충분해야 혁신을 하고 비용을 줄일 인센티브가 생긴다.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만들고 합리적 에너지 전환을 유도하려면 정부 지원과 탄소 배출 규제만으론 안 된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시장원리를 반영한 전기요금 체계가 동반돼야 한다. 중국도 최근 전기요금을 대폭 자율화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전력산업 구조 개혁은 20년 전 발전 부문에만 일부 경쟁 도입 후 답보 상태다. 그런데 규제 일변도의 전력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제주도는 올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활용해 전력거래 자유화를 향한 첫걸음을 뗐다. 전국 단위의 기존 전력망을 지역, 기업 단위의 ‘마이크로그리드’와 경쟁시키는 방안도 거론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통신 분야에서 이와 유사한 ‘5G 특화망’ 사업을 시작했는데 인공지능 등 다방면에서 혁신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전이 위태롭다.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해 멀쩡한 공사는 중단하고 효율성 낮은 신재생 발전업체 보상을 해주는 것도 모자라 대학까지 만들고 있다. 적자는 수직 상승 중이다. 정치가 아니라 경쟁이 필요하다.

사실 한국이 환경 문제에 보다 점진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선택했다면 경제성과 안정성에서 검증된 예전의 계획경제 구조가 나았을 수도 있다. 국가 이기주의를 감수하고 신패러다임이 완성될 때까지 추격형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이제 없어졌다. 미래 세대에 폭탄 대신 먹거리를 물려주려면 과감한 선도형 체제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