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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로 변혁기 역사의 무게 견뎌낸 시인, 파스테르나크”[석영중 길 위에서 만난 문학]

입력 | 2021-12-03 03:00:00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1948년 2월 23일 모스크바 종합과학기술박물관 강당에서 “서구의 전쟁광”을 타도하고 소련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시 낭송회가 열렸다. 행사에 동원된 스무 명의 시인 중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객석을 향해 놓인 무대 위 의자에 앉아서 사회자의 호명을 기다렸다.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첫 번째 순서인 알렉세이 수르코프가 정권 홍보용 자작시를 낭송하는 도중에 갑자기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인기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수르코프는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박수는 뒤늦게 무대에 나타나 조심조심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스무 번째 시인을 향한 것이었다.》



서정시인의 소설 ‘닥터 지바고’

페레델키노의 기념관에 걸려 있는 파스테르나크의 데드 마스크. 석영중 교수 제공

그의 이름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1890∼1960),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1958년에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된 소설가다. 마침내 파스테르나크가 등장하여 전쟁광 타도와는 무관한 서정시를 암송하자 객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66”이라고 외치자 객석 전체가 천둥이 치듯 발을 구르며 한목소리로 “66”을 외쳤다. 진땀을 줄줄 흘리던 사회자는 미친 듯이 종을 울려 휴식을 선언했다. 스탈린의 불가해한 변덕이 아니었더라면―“그런 뜬구름 잡는 녀석은 그냥 내버려 둬”―파스테르나크는 선동죄로 체포되어 엄벌에 처해졌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청중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66”은 파스테르나크가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66”을 가리킨다. “찬란한 명예가 엉뚱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예술이 권력 앞에서 벙어리가 되고 바보가 박사인 양 기술자를 통제하고 선한 포로가 악한 적장을 섬기는” 현실이 지긋지긋해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파스테르나크는 정권과의 불화로 1937년 출판을 금지당하자 번역에 전념했다. 번역은 당시 침묵을 강요당한 모든 문인들에게 호구지책을 넘어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다. 파스테르나크는 1939년부터 1950년까지 셰익스피어 희곡 8편과 소네트를 번역했다.


철길-시골길, 역사의 두 갈래길

파스테르나크는 셰익스피어 번역을 하는 동안 자신의 유일한 장편소설이 될 ‘닥터 지바고’를 구상했다. 전쟁과 볼셰비키 혁명, 그리고 내전으로 이어지는 대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시인이자 의사인 주인공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소설이다. 플롯의 핵심인 지바고와 여주인공 라라의 운명적인 사랑은 역사와 시인의 책무에 대한 저자의 사색과 얽히고설키면서 장대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시기에 그가 따로 필사해 둔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중 한 대목은 ‘닥터 지바고’ 독서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람의 일생에는 제각기 역사가 담겨 있어서/지나간 시대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나이다.” 과거는 완전히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미래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시인(문인, 지식인, 예술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가사 상태가 지배하는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가.

지바고에게 역사는 두 가지 길로 나타난다. 철길과 시골길이다. 두 길 모두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숲을 꿰뚫고 있는 두 갈래의 길―철길과 시골길에는 기다란 소맷자락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혁명의 기차는 뒤로 가는 법을 모른다.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을 태운 기차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내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러시아의 철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역사의 주역들을 의심하라”

지바고는 인류를 뭉텅이로 실어 나르는 철길의 역사에 등을 돌린다. “풀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역사의 움직임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주역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의심한다. “그 누구도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행동파들, 외고집 광신자와 날뛰는 천재들이 급조하는 것이 혁명이다.” 그는 인생 개조를 외치는 사람들도 의심한다. “인생 개조! 이런 소리를 예사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는 “남들이 노래하는 데 맞춰 함께 노래 불러야 하고 외부에서 강요하는 관념에 보조를 맞춰 살아가야 하는” 삶을 혐오하고 “하찮은 감상과 기계적인 이론”에 절망한다.

지바고가 걸어가는 길은 개개인이 멈추고 뒤돌아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시골길이다. 거기에는 제각기 다른 크기의 고통과 생명과 환희와 감동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소설 곳곳에서 지바고의 눈에 포착되는 러시아 산하는 그 자체가 시다. “어려서부터 지바고는 숲속의 저녁놀을 좋아했다. 살아있는 영혼이 그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몸을 꿰뚫고 어깻죽지에서 나래를 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렇게 진한 흑갈색의, 마치 녹아내리는 금덩이 같은 보리를 본 적이 없었다. 불길 없이 타고 있는 넓은 밭, 소리 없이 구원을 청하고 있는 드넓은 밭들이 차가운 적막에 잠겨 겨울빛이 감도는 하늘과 잇닿아 있었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에게 삶은 깊은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생성하고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하나의 신비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에 들어있는 지바고의 시 24편은 바로 이러한 삶을 증언함으로써 역사에 그 발자국을 남긴다. 현실적으로는 무능하고 유약한 그가 살아있음의 슬픔과 기쁨에 관해 쓴 서정시들이야말로 “허망하고 지루한 웅변”을 요구하는 시대에 대한 지식인의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응답이다.


배신자가 된 노벨상 수상자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작가촌 페레델키노에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기념관(왼쪽 사진)과 묘지가 있다. 혁명과 내전의 폭풍 속에서 서정시로 세상을 대한 그는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로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석영중 교수 제공

파스테르나크는 유명한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음악과 철학을 공부한 후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반혁명적으로 읽힐 소지가 다분한 ‘닥터 지바고’가 노벨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자 그에게는 조국의 배신자란 낙인이 찍혔다. 투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정부의 위협에 굴복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얼마 후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모스크바 근교 작가촌 페레델키노의 묘지에 묻힐 때 추모객들은 흐느끼며 그의 시 ‘햄릿’을 함께 낭송했다.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종막은 피할 길 없다/나는 혼자다, 세상엔 바리새인들만 득실거리고.” 그날, 천지에 라일락과 사과나무 꽃잎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던 날, 눈물 속에서 울려 퍼지던 ‘햄릿’은 서정시로 역사의 무게를 견뎌낸 한 위대한 시인에게 바쳐진 무형의 기념비였다.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