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아트로드]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애틋함 넘치는 우물가 부부나무 여인의 기다림 깃든 정읍사 오솔길 보물 감춘 내장산과 쌍화차 거리
전북 정읍시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에 있는 ‘월영습지’에 낙엽이 떨어진 물 위로 하늘빛이 비치고 있다. 월영습지는 인근 솔티마을숲과 함께 생태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오른쪽은 소나무가 우거진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숲속의 작은 연못. 물 위에 붉은색, 갈색, 노란색 낙엽이 가득 떨어져 있다. 우수에 젖은 습지 위로 비친 하늘빛이 신비롭다. 톡톡 토로로…. 어디선가 숲속의 괴물처럼 생긴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전북 정읍시의 소나무숲 오솔길에서 만난 월영습지. ‘월영’은 달그림자라는 뜻이다. 천 년 전 장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정읍사 여인이 바라보던 달도 이 습지에 휘영청 달그림자를 띄웠을 것이다. 천 년의 아름다운 사랑과 문학, 자연생태가 살아 있는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을 걸었다.》
○ 새암바다 마을의 부부나무
지난달 17일 저녁 정읍시내 공연장인 연지아트홀. 국악인 오정혜 씨가 진행하는 토크콘서트 ‘농담’의 초청 게스트인 재즈 가수 ‘말로’는 관객들에게 “정읍에 와서 받은 첫인상은 ‘정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느낌”이라고 인사했다.
정해마을에 있는 ‘새암바다 큰 우물’.
전북 정읍시 정해마을에 있는 ‘부부나무’. 버드나무와 팽나무가 한 몸이 된 연리목이다.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
“달하 노피곰 도다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칠백 년 넘게 구전돼 오다가 악학궤범(1493년)에 실려 전해오는 ‘정읍사’는 한글로 표기된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어둠은 깊어가는데, 행상을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아양산 고개에 올라 달님에게 빌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른다. 제발 달님이시여 높이 솟아 밝은 빛을 멀리까지 비춰주소서. 저자(시장) 거리를 헤매고 있을 남편이 혹시나 진 데를 밟지 않게 해주소서. 내 사랑하는 님이 곱게 깔아놓은 달빛을 밟고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소서….
그중에서도 가장 절절한 구절은 ‘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 곳에나 다 내려놓고 오세요)/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아, 내 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는 노랫말이다. 일이고, 돈이고, 물건이고…. 힘겹게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저 몸 성하게 집으로만 돌아오라는 말이 가슴을 적신다.
천년부부사랑 정촌가요특구에 있는 정읍사 여인상. 정면에 내장산의 아름다운 능선을 마주하고 있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그러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다. 사랑받을 수 있다.”(문순태 설화소설 ‘정읍사-그 천년의 기다림’ 중에서)
오솔길을 계속 걷다 보면 ‘월영습지’를 만난다. 2014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저층형 산지습지로 과거에 벼농사를 했던 폐경지가 자연 천이에 의해 복원된 습지다.
월영습지에는 구렁이, 수달, 말똥가리, 수리부엉이 등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다. 평지와 산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는 독특한 생태계로 절대보전등급 1등급을 받은 습지로, 인근의 솔티마을숲과 함께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생태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월영습지에서 더 걸어가면 시누대숲이 나오고, 내장호로 이어진다. 내장호 수변 덱(deck)길을 한 바퀴 도는 2코스(3.5km),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강변을 따라 정읍사공원으로 회귀하는 3코스 자전거길(6.2km)도 있다. 정읍시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단을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둘레’의 안수용 이사장은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은 연인이나 부부가 사랑의 의미를 찾고, 소나무와 호수가 어우러진 생태를 탐방하는 힐링 숲길”이라고 말했다.
○내장산과 무성서원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의 끝에는 내장산이 있다. 내장산의 ‘내장(內臟)’은 안에 보물을 품고 있다는 뜻.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805권을 정읍 태인의 선비 손홍록과 안의가 내장산으로 옮겨와 석벽의 ‘용굴’에 감추고는 1년이 넘도록 머물며 지켰다. 서울, 충주, 성주에 나눠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다 불타고 사라지고 남은 마지막 실록이 정읍 선비들 덕분에 지켜질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올 3월에 방화로 전소됐던 내장사 대웅전의 현재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내장산의 수려한 봉우리와 전각들로 둘러싸인 대웅전이 철제 컨테이너로 임시로 지어진 모습은 마치 현대미술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컨테이너 대웅전에 걸린 ‘큰 법당’이라는 현판의 글씨에서는 힘이 넘쳐 그나마 관람객의 마음을 달랜다.
내장산을 구경한 후 발길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옮긴다.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857∼?)과 조선시대 ‘상춘곡(賞春曲)’을 지은 선비 정극인(1401∼1481) 등이 배향돼 있는 서원이다.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넷 사람 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로 시작되는 ‘상춘곡’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안분지족을 노래한 최초의 한글 가사문학이다. 주변에는 선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고택도 많다.
정읍시 쌍화차거리의 명물인 쌍화차. 가래떡구이와 꿀, 누룽지도 함께 준다.
사진·글 정읍=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