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보나르 ‘욕조 속 누드’
머리가 아닌 마음 깊은 곳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감정은 어떨 때 일어나는 걸까요. 어려운 것을 성취했거나, 경쟁에서 이기거나,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을 때의 기쁨이 과연 우리의 마음까지 뒤흔들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아주 짧은 순간의 기억.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노을을 지켜본 추억, 친구들과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며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 기억, 어릴 적 학교 앞에서 먹은 떡볶이의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 머리가 쌓아 놓은 장벽은 와르르 무너지고,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아, 그 때 생각나. 너무 좋았어”하며 행복함을 느낍니다.
저는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서 나온 여인의 손짓을 이런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때로는 이성이 요구하는 성취보다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이 더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불멸로 남는다는 것을요. 오늘 만나볼 그림은 이런 찰나의 순간을 불멸로 남기기를 시도한 작가의 작품입니다.
거꾸로 매달린 다리
제가 이 그림을 본 순서대로 설명을 해 보았는데요. 이렇게 작가가 펼쳐 놓은 시선을 따라가면서 저는 정말 대담하고 독특한 매력을 가진 그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면 캔버스의 절반을 커다란 욕조와 다리가 차지하고 있거든요.
가장 어색한 것은 마치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다리의 모습입니다. 무심코 보면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해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런데 이 어색함을 감춰주는 것은 극도로 배제된 색채이죠. 무채색에 가까운 표현으로 욕조는 조금 가볍게, 그리고 카펫의 화려한 색으로 이 어색함을 더욱 덜어 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떤 사람 이길래, 이런 이상한 구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걸까요?
욕조 속 여인
그림 속 여인을 통해 작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에르 보나르는 욕조 속 여인의 모습을 많이 남겼는데요. 그 여인은 바로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 드 멜리니입니다.
두 사람은 1893년 처음 만나 멜리니가 세상을 떠난 1942년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습니다. 보나르의 그림들 속 등장하는 여인 대부분이 멜리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보나르는 멜리니를 모델로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예술가와 뮤즈의 낭만적이기만 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시각으로 본다면 보나르와 멜리니의 관계가 마치 금이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뒤 오랜 시간 함께하며 결국 끝까지 서로의 곁을 지켰습니다.
보나르가 특히 욕조 속에 있는 멜리니를 많이 그린 이유는 그녀의 건강 문제 때문입니다. 다양한 질환을 앓았던 멜리니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매일 약물에 목욕을 했습니다. 게다가 멜리니가 사람들을 싫어하는 탓에 말년에는 두 사람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불안한 순간이 아름답다
아픈 연인과 고립된 삶. 약간은 우울한 기분이 감돕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정한 순간을 보나르는 캔버스에 그려내며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했습니다. 보나르의 마법은 바로 ‘유머’입니다.
보나르의 친구들도 그가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보나르의 친구이자 화가겸 작가 오렐리앙 뤼네-포는 이렇게 썼습니다.
“보나르는 유머가 넘쳤다. 그의 무심한 듯 능청맞은 유쾌함과 재치는 그림 속에서도 드러났는데, 장식적 요소에 담겨 있는 엉뚱한 날카로움이 그러했다.”
그러니 무언가 정적이고 고요한 순간에도 보나르는 멜리니의 욕조 속 다리, 강아지의 주둥이처럼 슬쩍 꼬집을 만한 것을 찾아내고 거기서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학교 앞 떡볶이 냄새, 매일 볼 수 있는 노을, 데굴데굴 구르는 나뭇잎과 같은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보여준 것이지요.
이런 보나르의 예술을 피카소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보나르에 대해 묻지 말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보나르는 선택할 줄을 모른다. 하늘을 그릴 때면 처음엔 하늘과 비슷한 푸른색을 칠해놓고는 여기저기 보라색을 더해 얼버무린다. (…) 결과물은 ‘선택장애’의 꽃다발이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지죠.
“그림은 그런 식으로 그리는 게 아니다. 그림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힘을 쥐는 것, 대상을 정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이 좋은 조언을 해주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피카소와 보나르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피카소는 ‘떡볶이 냄새 같은 사소한 것을 은은하게 그리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누가 봐도 힘이 넘치는 것을 그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육즙이 줄줄 흐르는 스테이크나 시뻘건 마라탕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욕망의 화신 피카소다운 평가입니다.
둘 중 누구 한 사람만이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피카소가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지금까지는 그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고소하고 달콤한 마들렌 냄새의 아름다움을 줄줄 풀어 놓을 수 있었던 보나르의 그림이 오늘은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두 작가의 그림을 비교해보면서 오늘은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나를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